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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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2년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신여성읽기세미나팀이 1백년 전에 발행한 월간지 <신여성>을 함께 읽고 탐구한 글쓰기를 20년 만에 재출간한 개정판이다. 머리말에서, 20년 전 초판에서는 <신여성>이라는 매체를 탐사하고 꼼꼼하게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개정판에서는 매체의 소개보다 당시 '신여성'이라고 불리던 여성들을 소환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고 썼다.  





 
 
여성의 소비를 여성의 허영으로, 여성의 허영을 여성의 본능으로 만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던걸을 정신적 미성숙자로 몰아간 남성의 욕망과,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 여성의 욕망이 동시에 드러나며 충돌한다. 관음증으로 드러나는 남성의 심리를 식민지 현실과 연관시켜보면 한층 더 흥미롭다. 제국주의자들은 대체로 스스로를 남성으로, 식민지민을 여성으로 규정한다. 여성이나 다름없는, 무력한 타자로 전락한 식민지 남성의 주체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이에 따라 식민지 남성들은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주체화를 꾀한다. 이 부분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봉급생활자를 그만둔지 한참 전이라 요즘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돌이켜 보면 적어도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주체화를 꾀하는' 남성들은 사회 조직 안에 상당수(경험적으로는 대부분)였다. 


1920년대 초반 월간지 <신여성>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내야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만, 실제 문 밖으로 나온 신여성을 지속적으로 비판(이라고 썼으나 비난에 가깝다)했다. 또한 <신여성>에는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양육에 대한 기사가 적지 않았는데,  독자에게 어머니로서 반드시(?) 알아야하는 주의 사항(모유 수유, 이유식 등)과 함께 아동 교육에 관한 지식, 아동의 성장과 영양학적 관계, 아동심리, 아동기 질병과 간호 등 의학적 지식을 갖춘 '관찰자로서의 어머니'역할을 강조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성에게 능력과 정숙(더하기 순종)을 함께 요구함으로써 안팎으로 완벽하기를 바랐고, 이는 현재의 슈퍼워킹맘으로 재현되고 있는 건 아닌가싶다. 그래서 이 책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책을 받고 읽기 전부터 가장 궁금했던 점이 있었는데 월간지 <신여성>과 '신여성' 담론의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였다. 마침 3장에서 이에 대한 화두, '신여성들을 명명하거나 재명명하는 담론적 주체는 누구인가?'를 던진다. <신여성>에 실렸던 내용의 면면을 살펴보면, 지금으로 치자면 소위 '운동권' 학생이자 여성 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송계월이 맡았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잡지 <신여성>에서의 여성은 주체가 아닌 계몽의 대상이었다. 필진 또한 대부분 남성이었고, 그들의 글은 사실에 기반한다기보다 한 단면을 부풀리고 확대해 마치 소설을 쓰듯 서술하면서 여성들에게 순한 양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야단치거나 빈정거린다. <신여성>에 실린 글들을 보면 시대는, 그리고 남성은, 여성의 자아와 욕망을 타락으로 치부하고, 연애의 실패나 여성의 매춘을 시대에 따른 결과가 아닌 여성 개인의 문제로 몰아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래봐야 100년도 안 된 과거다. 어느 면으로 보자면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ㅡ대체로 물리적인 것들ㅡ이 바뀌었고, 다른 면에서 보자면 지긋지긋하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가사 노동과 양육은 여전히 '노는 일'로 취급되기 일쑤고, 남성의 출산 및 육아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직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의 퇴근 후 주 양육자는 어김없이 여성이다. 임금과 승진 차별은 여전하고, 일하는 기혼 여성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다(어디 기혼 여성뿐이겠냐마는). 또한 직장 내 성추행은 남성보다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비율이 훨씬 높다. 1930년대 당시 언론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인 김경재가, '국가의 조직이 남자를 본위'로 하고 있는 세상에서 '경제적 실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사이에는 주인-노예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일견 긍정하게 된다. 김경재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제권이 우선해야 했다. 그의 표현이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1930년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여성의 등장. 지금의 우리들은 월간지 <신여성>이 '신여성'의 불온함을 비판하는 글 안에서 그 이면의 것, 문장 사이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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