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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평점 :
소설은 1980년부터 2014년까지를 서술하지만, 제주민 학살 및 우키시마호 사건을 비롯한 광복 무렵과 제1공화국 출범 시점을 서사의 시작 배경으로 둔다. 제3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전개하는가 하면, 1인칭 직접 서술을 통해 독자가 화자의 입장에 좀 더 접근하고 이입해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소설은 여러 입장에서의 감정으로 읽혀진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기존의 디아스포라 문학이 주로 이방인 혹은 소수 민족으로서의 소외와 고독을 다뤘다면, <해방자들>은 등장인물들이 떠나온 조국을 향한 그들의 회한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이자 외부자로서의 시선으로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모습을 조명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남한의 단독 개최, 1970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의 사과, 1984년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분단과 통일에 대한 다른 관점, 대북 정책, 삼풍백화점 붕괴, IMF 외환 위기, 이주민 차별, 세월호 사건 등 한국에서 30여년 동안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을 지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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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혐의를 받고 수감된 후 살해 당한 요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결혼하고, 결혼 직후 혼자 이민을 떠난 남편의 부재 속에서 자신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시어머니와의 동거를 시작해야만 했던 인숙, 버림받을까봐 두려웠던 후란, 오직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고일, 인숙과 조국의 통일에 대한 집착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로버트, 목숨을 건 탈출과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미국에 발을 디딘 탈북민 제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몇몇 장면이 있다.
먼저 요한이 교도관에게 고문을 당하하면서 그 두 사람이 손가락 글씨로 주고받은 필담 아닌 필담이다. 교도관은 죽음을 비롯해 여러 단어를 나열하지만, 요한은 그에 대한 답변마다 오로지 한 단어만 쓴다. 바로 '삶'. 죽어서야 감옥을 나갈 것을 알았을텐데, 요한이 말한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보이지 않게 쓴 '삶'은 딸 인숙을 통해, 더 나아가 후손 대대로 이어질 생명력과 저항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부모 없이 홀로 서야 하는 인숙에 대한 걱정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었을까.
두 번째는, 노년의 후란이 입원하고 병실에서 처음으로 인숙에게 진짜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독한 말만 쏟아냈던 후란은 사실 아들인 성호보다 인숙에게 더 의지했고, 인숙이 도망갈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성호가 미국에서 연락해 오지 않았다면 며느리와 자매처럼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숙 역시 이때 처음으로 후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이 모습은 성호와 인숙이 결혼 생활을 회복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 감정이 원망이든 애정이든 분노든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지름길인듯 하다.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이 고부의 서사는 인숙과 제니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된다. 이것이 세 번째 인상적인 부분이다. 인숙은 후란과 자신이 그랬듯 아들 헨리보다는 제니와 손자 하루에게 더 깊은 애착을 느낀다. 물론 후란과 인숙의 관계가 애증(속된 말로 미운 정도 정)을 기반으로 했다면, 인숙과 제니(와 하루)는 신뢰와 연민에 있다.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후란 - 인숙 - 제니로 이어지는 연대는 남편의 부재를 대신하는 그 이상의 무게와 견고함을 갖는다. 오십대가 된 인숙은 제니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서 이제야 엄마가 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는 마치 내가 인숙이 된 것처럼 수십 년의 세월이 잔잔한 물결이 되어 내 가슴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촉촉해진 눈으로 '인숙'이라는 글자가 그녀의 얼굴인 양 바라보고 있더라는. 그야말로 더없이 흐뭇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