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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ㅣ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평점 :
이 잔혹한 비극이 한 사람의 문맹에서 비롯됐다니!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공범자, 사망자까지 모두 밝히고 출발한다. 또한 2주 후 유니스가 체포되었는데 글을 읽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소설을 읽는 이들의 궁금증은 그녀가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인지, 아니면 체포되었다는 것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가 깊게 들어가면서 유니스 파치먼이 일가족을 살해한 직접적인 동기가 더 궁금해지고, 사건이 발생하는 2월 14일이 다가올수록 독자의 긴장감은 높아진다.
소설을 읽다보면 유니스의 범행 동기와 배경은 '문맹' 하나로 단정할 수 없고,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고정관념과 혐오, 허영과 오만, 맹신과 광기 등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외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깔려있다.
우리는 흔히 범죄자의 개인 서사로 범죄를 미화하거나 희석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양육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유니스의 아버지가 딸의 문맹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녀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이 그토록 크게 자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어른들의 관심 밖으로 내쳐진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유니스가 무례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무지하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예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학업과 사회성을 비롯해 우정, 사랑, 친밀감 등사람이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야 하는 모든 것들을 배울 기회를 강탈당했다.
유니스가 인간은 혐오하고 경계했으나 사물에 대한 애정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동차를 빌려주겠다는 재클린의 제안이나 멜린다의 친근함 등 타인의 배려를 '침범' 혹은 '의도'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살해 현장에서 커버데일 가족의 시신을 보고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은 반면 양탄자가 엉망이 된 데에 안타까워하면서 본인에게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사실에 기뻐한다. 심지어 집 안을 정리한 뒤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깨끗해진 집 안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소설 곳곳에는 유니스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의심할 만한 장면들이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문맹에 과도하게 집착한 그녀의 피해의식이 원인이 되었는지, 혹은 그와는 반대 상황인지도 궁금한 부분이다.
유니스의 공범 조앤 스미스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유니스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양육 환경에서 성장해 영리하고 똑똑한 그녀의 삶이야말로 극적이다. 중산층 가정의 촉망받는 소녀에서 매춘부로 전락하기까지, 그리고 광신도로 미쳐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꼬집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커버데일 일가족은 살 수 있었다. 객관적인 증거든 직감이든 유니스를 해고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유능한 가정부보다 자신을 귀족 부인처럼 떠받들어 줄, 말없이 순종적인 하녀를 원했던 재클린의 허영심, 그리고 유니스가 함께 생활할 인간이라기보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부리는 기계로 여겼던 오만이, 죽기 전까지 무수히 보내온 비극의 사인을 무시하고 만다. 하지만 설령 그들이 살았다하더라고 유니스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누구든 그녀 내면에 잠재해 있는 스위치를 켜는 순간 참극은 언제든 벌어졌을테니.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유니스는 그저 무뚝뚝하고 주어진 일에 충실한 평범한 중년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달라진다. 그녀의 과도한 피해의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문맹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수는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은 제 정신이 아닌 광기어린 두 여인이 저지른 살인극이면서 동시에 사회 저변에 당연시 여겨지는 그릇된 고정관념과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한다. 유니스는 그토록 숨기고 싶어했던 자신의 약점을 공개 석상에서 만천하에 드러내고 인정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내가 유일하게 유니스를 연민하는 장면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날카롭게 추리하는 셜록이나 푸아로는 없다. 유니스가 체포되는 결정적 증거 하나.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근래의 추리소설과는 다른 읽는 맛이 있다.
범인 찾기, 밀실 트릭, 반전의 반전이 없는 추리 소설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 치딩투데이를 통한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