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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평점 :
소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파란 피부의 다문화 가정 소년의 성장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현재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면서 21세기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던 갈등과 폭력적 사건을 관통한다(배경이 되는 미국은 다민족, 이민자 국가로서 상징되는 부분이 도드라진다).

베트남인 재일의 엄마와 한국에서 일하는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미국으로 이민 간 재일의 아버지가 처한 상황과 동일하다. 재일의 아버지가 한국의 가구 공장에서 소위 갑질하는 자국 노동자였다면, 미국에서는 최하위층 이민자다. 한편 재일의 '파란 피부'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혐오의 대상이다. 미국에서라면 '파란 피부'에 대한 경계와 혐오가 덜 할 것이라는 재일의 기대는 보기좋게 어긋난다. 심지어 동네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무조건적인 1순위로 용의 선상에 놓인다.
소설에서는 재일의 파란 피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다수에 속해 있음이 정상성을 정의하는 세상에서 재일의 피부는 확연한 비정상이었다. 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살가운 태도로 나를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에는 반드시 동정과 연민 그리고 약간의 자기만족이 섞여 있었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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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눈에 들어왔던 인물은 재일의 아버지다.
그는 억약부강抑弱扶強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한국에서 자신보다 더 짙은 피부색을 가진 유색인 이주 노동자들을 멸시했고, 미국에 이민 와서도 업무적으로 더 지위가 높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흑인이라면 무시하고,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무시받는다고 분노한다. 다른 한편으로 백인과 한인회 회장에게는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캐릭터라 새로울 게 없다. 진짜 궁금한 점은 그는 왜 미국으로 이민을 왔냐는 것이다. 그의 생활을 보면 파란 피부를 가진 아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꾼 것도 아니다. 나중에 둘째를 데리고 합류하겠다던 아내와 연락이 끊겨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미국 생활에 적응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겨도, 학교에서 폭행을 당해도, 집으로 보안관이 아들을 찾아와도, 같은 아픔을 공유한 친구의 죽음에 공포를 느끼는 아들의 고통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믿고 의지했던 엄마마저 없는 낯선 이국 땅에서 고립된 재일에게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아버지조차 이 지경인데, 재일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겠나, 싶다(사실, 아버지의 무지와 무관심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만).
소설에는 셀마가 재일의 사진을 찍어 보정을 통해 파란색을 걷어내어 재일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재일은 그 사진 속에서 평범한 아시아인 고등학생 얼굴이 된 자신을 본다. 파란색만 제거한다면 자신이 그렇게 평범해 보일 줄 몰랐다고 말하는 재일을 통해 '평범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발췌문에서 보여지듯 우리 사회에서는 다수성, 정상성, 평범성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 이를 강력한 기반으로 삼는 사회에서 혐오와 폭력이 사라지기는 요원하다.
차별과 혐오는 장소, 인종, 성별,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세워 놓은 정상성과 평범성의 경계 밖으로 내몰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경계 밖으로 내몰린 자의 상실. 엄마, 유일했던 두 친구, 자신의 미래를 격려했던 삼촌 등 삶의 지지대가 되어주었던 사람들을 상실한 재일의 고통은 차별과 혐오,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재일의 엄마 이름은 소설 마지막에서야 알 수 있다. 응우옌 우 녹. 그녀의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여자'로만 인식되어진다. 다수자들이 하나로 명칭한 그들 모두에게 각각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람한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