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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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17세기 예술가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우면서 한편으로는 슬프고 애잔하게 펼쳐놓는다.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술하고 하나의 사건이나 상황을 두고 각자의 입장이 드러나는데, 처음에는 시간이나 장소 혹은 상황의 전환이 생뚱맞은 게 아닌가 싶지만, 결국 각각의 이야기들은 한곳으로 모이며, 등장인물들의 인연과 그들의 예술, 그리고 사랑은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깊게 사랑했던 연인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난 튈린, 느닷없이 사라져버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를 끌어안고 정처없이 떠도는 하튼,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이름까지 바꿔 세상을 피해 살아야했던 이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음악을 찾아다닌 절대음감의 소유자 야콥, 전쟁이 끝나고 수도원을 세운 아브라함, 어린 나이에 살인 현장을 목격한 마리 에델, 일평생 자유를 갈망하다가 반평생을 함께 해온 반려말의 죽음으로 급속하게 노화한 지빌라 공녀.  


정쟁과 전쟁, 국가의 흥망성쇄, 들끓는 종교, 막을 수 없는 전염병들, 어지러운 국제 정세 등 17세기 당시 궁정 음악가의 시선에서 바라본 유럽의 변화무쌍한 모습도 소설의 재미있는 요소다. 또한 연인의 육체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자연물과 예술에 빗댄 표현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워 소설을 읽다보면 줄거리를 차치하더라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게 느껴진다. 







 
소설은 카드 놀이에서 시작하고, 도박은 주요 소재 중 하나로 쓰인다. 하노버는 더는 도박이 안겨주는 걱정에도, 도박에 요구하는 예측력에도, 그 예측의 취약함에도 강박적으로 사로잡히고 싶지 않다면서 도박을 겁내고 거부하는 이유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하노버의 말이 도박이 아닌 사랑에 대한 얘기로 읽힌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거부하고 도망 갈 때도 있지만, 또 혼자 있는 건 죽을만큼 외롭다. 


야콥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음악을 찾아다녔다. 존재하지 않는 음악은 그의 열정으로 이루어지고, 그 자신이 음악이 되어 간다. 튈린은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이 낳는 고통에 몰두했다. 음악에 대한 사랑, 음악에 의한 고통. 이는 곧 튈린이 가진 열정이다. 이처럼 사랑과 음악은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이 소설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진심어린 어루만짐과 위안을 얻는다는 것의 의미, 슬픔을 넘어서 죽음에 더 가까운 사랑의 상실. 사랑에 내용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튈린을 뒤쫓다보면 납득이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질문은, 왜 튈린이 하튼을 떠났냐는 것이다. 그것도 일언반구없이, 도망치듯이, 사라지듯이. 그리고 왜 끝내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그 이유가 너무 안타깝다). 생의 마지막날에도 그를 잊지 못했으면서. 튈린은 하튼을 떠나고 더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고, 노년의 하튼 역시 튈린을 그리워한다. 작정한다면 얼마든지 닿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두 사람의 심경이 어떠 것인지 알 것 같더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깊은 슬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음악이 갖는 마법같은 불가사의한 힘.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음악이 가져다주는 기적같은 놀라운 일들. 예술가들의 우정과 대중으로부터 빠르게 잊혀지는 음악가들의 숙명. 소설 속 예술가, 그들의 죽음은 하나같이 느닷없고, 허망하며, 살아 있는 자들을 홀로 외롭게 만든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니 가슴 한 켠이 뻥 뚫린 것같은 헛헛함이란... .
소설은 모든 사물, 풍경, 감정 등을 지나치다싶을 만큼 세밀하게 묘사한다. 자신의 시원과 내면의 언어를 찾아 부유했던 예술가들의 삶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소설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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