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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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작가다. 제목에 이끌러 검색을 하고, 미리보기가 제공되지 않아 이런!하면서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책소개를 읽던 중에 생각보다 빠르게 읽을 기회가 닿았다.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시, 에세이, 편지, 인터뷰, 연설문, 기고문 등을 모은 책이다. 일단 서문만으로도 저자의 필력에 감탄한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을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 차별과 학대에 노출된 서사를 갖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학살이 자행된 많은 장소와 공간, 그 안에서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한 사람들을 방문해 만났다.  


여성 노숙 쉼터를 시작으로 마누스섬 난민 임시수용소, 자그레브, 콩고 부카부, 테레지엔슈타트, 파키스탄 라왈핀디에 위치한 보스니아 난민 캠프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전한다. 노숙자와 난민 실태, 난민 수용소 내 강간 및 살인, 에이즈 환자에 대한 혐오, 근친 강간, 가정 내 (성적) 학대와 구타, 가스라이팅, 전쟁 강간, 집단 성폭행 및 성고문, 성노예(위안부), 임신 중지권, 재난 가부장제(재난으로 인한 단절과 고립으로 가정(성)폭력이 강화)와 여성 실업 등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호소한다.  


분쟁 지역에서 강간의 잔혹함은 상상을 불허한다. 강간을 전쟁 무기로 사용하다보니 가해자는 일말의 가책조차 없다(이 부분은 크리스티나 램의 『관통당한 몸』에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피해자임에도 존재를 거부당하고, 용서의 주체가 되지도 못한다.가부장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라고 여기지만,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채 여건만 되면 언제든 수면으로 기어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은 지난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불행은 우리가 아는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 유례없는 감염속도로 대부분 사회 시스템이 단절되면서 여성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감금, 경제적 불안과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완벽한 조건에서 발생한 가정 내 학대와 (성)폭력, 극단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자 아이들, 교육의 중단과 부재는 인류의 퇴보를 불러왔다.   


저자는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며, 사회를 이루는 근본 신념, 가치 중심이 되는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어떻게 다룰지 질문해야하고, 가해자를 억압하기보다는 반성하기를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약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해롭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이는 정희진, 리베카 솔닛 등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내용들과 일치한다. 



특히 실린 내용 중 <만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지?> 는 가장 공감한 글이었는데, 저자의 글에서처럼 초를 켜놓고 명상의 시간을 갖게 했다. 현재는 종식됐지만 불과 몇 년 전에 팬데믹을 관통하던 시기에 쓴 글인데, 그때를 기점으로 확연하게 달라진 지금에 맞춰봐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처럼 실체가 불분명한 것, 혼란에 글복한다. 실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나은 것을 선택하기에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이 불편해 진실이나 미래의 안녕보다는 당장의 안락을 택한다. 결국 세상을 바꿀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다.    



이 책은 저자도 언급했듯 사유에 관한 이야기이며, 상실과 모순, 슬픔, 트라우마에 관한 사유이기도 하고, 글쓰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글쓰기에 얼마나 진정성을 담았는지 모든 페이지에서 느껴진다. 저자는, 글이 친구였고, 힘이었고, 창窓이었고, 저항이었고, 자신의 생존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작가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온 열정을 담아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이 곧 삶이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는 사명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문 전체를 필사한 책은 처음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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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가 진짜인 것에, 작은 것에 뿌리내리고 그 누구도 전쟁과 탐욕과 기후 재난으로 자신의 장소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일회성으로 사용되고 폐기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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