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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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20년에서 시작한다.
조선 최초의 호텔 커피숍은 제물포의 대불호텔, 경성의 조선인 최초 끽다점은 백림관, 두 번째가 카카듀다.







책의 앞표지를 펼칠 때만해도 '카카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첫 페이지의 '현앨리스가 나타났다'라는 문구를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미옥이 부산에서 하와이로 향하는 배를 타기 전 자신의 첫 이름은 미옥이 아닌 '앨리스'였다는 대목에서 "으... 응?" 하다가 "?!!". 그렇다, 이 소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실존했던 이들이었고, 사실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었다(변사의 느낌이 좀 나려나?).  


소설 속 서술자는 1인칭 화자로서 배우이자 감독인 이경손. 그를 비롯해 한국의 마타하리라 불리는 독립운동가 현앨리스, 배우이자 감독 나운규와 정기탁, 배우 김일송, 가수 이애리수, 의학박사 이성용, 작가 김명순 등이 대거 출연(?)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극예술 및 영화예술을 소재로 192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예술인과 독립운동가 들, 그리고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에 바탕해 풍성하게 서술한다. 


3부까지가 관훈동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과 10여년에 걸친 이경손의 눈물겨운 영화 제작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마지막 4부에서는 현앨리스의 삶을 조명함과 동시에 당시 여성의 삶과 조선 밖에서 벌어진 조선의 대외 정치적 상황을 단편적으로나마 그리고 있다. 상해에서 박헌영과의 만남과 사회주의 사상, 아버지만큼이나 단단했던 어머니의 권유로 떠난 일본 유학, 현실적인 안주와 너른 세상을 향한 자유와 가족의 기대 사이에서의 갈등, 결혼과 이혼, 하와이 이주민 2세대이면서 조선과 상해와 일본을 넘나들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현앨리스의 안타까운 최후. 그리고 그녀를 향한 이경손의 애잔한 그리움. 소설 속에서 그의 그리움은 개인 대 개인을 넘어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앨리스와 이경손은 경계에 선 인물들이다. 조선의 구습에 순종하지 않고 과감하게 제 인생을 선택했고 스스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나 이념과 국가의 경계에서 사라져버린 미옥, 현앨리스. 이경손 역시 누대 의관 집안에서 보헤미안을 자청하며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삶을 뿌리치고 나왔으나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문중의 일원이 아닌 개인으로서 현실적 한계를 깨달으며 열패감에 시달린다. 또한 경손은 미옥을 바라보며 정치와 사상,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에 남녀 구분이 없음을 인정지만, 결국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된 자신의 이중성을 깨닫는다.  


이경손은 앨리스의 최후를 알았을까.
앨리스가 늘 그래왔듯 소식 한 장 없이 아무렇지 않게 눈앞에 나타나기를, 이국 땅에서 기다리는 이경손의 마음이 애틋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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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이 실제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듯 이번 작품에서도 모든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제작한 OTT 시리즈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다. 


여차하면 무거워질 소지가 다분한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펼쳐놨다. 특히 화자인 이경손은 시종일관 진지와 허당을 오가며 스토리를 이끌어가는데, 어딘가 어리숙하고 보헤미안을 꿈꾸는 그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당시의 영화 시장과 현장에 대한 서술은 예상치 못한 재미 중 하나였다. 캐스팅이 확정된 주연 배우가 도망가는 건 예사고(감독도 튀고, 제작자도 튄다), 영화를 찍네 마네 변덕을 부리는 일도 허다하다. 거기다 투자도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가 느닷없이 발을 빼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읽는 나는 웃었지만, 당시 관련자들은 속 꽤나 상했겠구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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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앨리스나 김명순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애통할 일이다.
앞서 썼듯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그들 중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나운규 정도가 아닐까. 이러한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후대를 위해 길을 만들어 갔는지 새삼 먹먹해진다. 그들 나름의 선택이 대의에 기반하든 사적인 욕망이었든, 그들의 삶으로 우리의 삶이 또다시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오늘도 배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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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얼마나 즐겁고 쓸쓸한가.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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