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더링 하이츠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에밀리 브론테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대로 가독성 하나는 탁월한 소설이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즈음에 처음 읽었을 당시, 번역이 매끄럽지 않았음에도 서점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반나절 만에 거의 다 읽다가 뒤로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샀었더랬다. 하물며 지금은 번역까지 부드러우니 그야말로 책장이 죽죽 넘어간다. 


먼저 이번에 읽으면서 사이사이 놀랐던 지점은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너무 젊다는 것. 캐서린, 프란시스, 이사벨라, 힌들러까지 모두 이십대에 죽음을 맞았다. 출산 과정에서 죽은 두 여인이나 술독에 빠져 제 인생을 마구잡이로 던져버린 힌들리 등 그들이 고작 이십대 중반(혹은 그 이전)이었다니. 그들보다 조금 더 산 에드거가 죽은 나이는 서른아홉 살. 거기다 두 주인집을 오가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상황을 대처해 온 엘렌조차 힌들리와 동갑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그들의 나이를 크게 염두해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혀 기억이 없는 걸 보아서는. (에밀리 브론테가 이 소설을 집필한 나이가 스물여섯 살, 그리고 폐결핵으로 사망한 나이가 서른 살이다. 작가조차 너무 젊었다.)  





 
이제 소설 얘기를 해보자.
나는 그동안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사랑했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당장은 그들에게 질투와 애증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 저마다 제 방식대로의 사랑을 주장하지만, 그 사랑의 실체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며 강압적이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는 단연코 히스클리프다.
히스클리프를 지금 기준으로 단정하면 그는 범죄자다. 스토킹, 납치, 감금, 가스라이팅, 사기, (성)폭행, 아동 학대 및 미성년 폭행 등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오해에서 시작된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지독하고 잔인하다. 캐서린에 대한 집착 역시 사랑보다는 복수에 가깝다. 그 복수의 대상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경계가 없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학대했던 사람은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약점을 잡아 복속시켜 모멸감을 안기고, 아무 죄가 없는 어린 아이들의 인생까지 망가뜨렸다. 또한 변호사를 매수해 죽은 에드거를 캐서린 옆에 안치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악행을 저질렀다(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에드거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기탱천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에드거가 무슨 잘못을 했나!). 소설 내내, 협박과 폭력과 거짓과 애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히스클리프를 보고 있으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인데,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라고 할만하다. 그의 이 크고 깊은 복수심의 원인은 무엇에 기인한 걸까. 


읽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인물은 캐서린이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캐서린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캐서린이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를 읽어보면 그녀는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선택의 불안이 무엇에 기반한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 에드거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이 솟는다. 그리고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에드거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는 건 지체를 낮추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변명하면서 히스클리프와는 하나의 영혼이고, 에드거와는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심지어 남편될 사람이 히스클리프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면서 남편을 통해 히스클리프의 입신을 돕겠다는 계획까지 세운다. 그녀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뿌리이자 근원이고 캐서린 자신과의 합치라면, 에드거 린턴에 대한 사랑은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잎사귀와 같다. 결국 두 남자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얘기인데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한 캐서린에 의해 히스클리프의 그녀에 대한 집착과 분노, 그리고 에드거를 향한 증오가 더 고조된 건 아닐까싶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예민함은 물론이고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때에는 정신착란까지 일으킨다.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 사람은 자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폭력을 휘두른다. 두 사람은 거울처럼 서로에게 자신을 투영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을 공유한,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그래서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때 죽은 캐서린을 향해 애도가 아닌 "고통을 맛보며 눈을 뜨기를! (p268)"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이유 역시 자신의 죽음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드거를 향한 히스클리프의 증오가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컸던 이유 역시 같은 연장선인 듯 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히스클리프가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 같고.  


히스클리프는 스스로 오직 캐서린의 사랑만을 원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끝없이 욕망만을 거듭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ㅡ 


이 소설에서 '어른'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은 에드거 린턴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때로는 한 발 물러날 줄도 알며 기다릴 줄도 아는 사람. 자식과 조카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난날의 원수 관계는 문제 삼지 않는 사람.   


에드거와 힌들리는 둘 다 아내가 출산 과정에서 죽음을 맞지만  두 사람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힌들러가 자기 연민에 빠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유기하고 자신을 포함해 아들까지 절망과 불행에 던져버렸다면, 에드거는 고독의 시간을 통과해 태어난 아이를 새로운 희망으로 삼았다. 그리고 에드거는 캐서린의 시신을 교회 안 린턴 가문 혹은 언쇼 가문의 묘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묘지 한구석의 푸른 비탈에 묻었다. 그리고 에드거도 죽은 뒤 그곳에 묻혔다. 에드거는 아내와 자신의 묘지를 왜 가문의 묘지가 아닌 공동묘지의 한적한 곳을 택했을까? 어쩌면 죽어가는 와중에도 히스클리프를 걱정했던 아내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사족으로, 굳이 힌들리를 변명해보자면, 유년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모자라 더부살이 소년에게까지 치이고 굴욕감을 느끼며 성장한 그의 결핍을 채워주고 행복을 안겨준 아내는 힌들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이자 큰 의지처였을 것이다. 아마도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을듯하다.  


ㅡ 


친아들을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상속을 받기 위한 도구로만 여겼을 정도로 히스클리프는 언쇼와 린턴, 두 집안을 결딴내기 위해 인생을 다 바쳐 맹렬히 노력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그가 캐서린을 제외하고 비록 한조각이나마 마음을 내준 사람이 그토록 증오했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더구나 그가 무자비하게 쟁취한 두 집안의 재산 역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간 셈이니 히스클리프의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더구나 두 아이 모두에게서 캐서린의 얼굴이 보인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모를 수 없다.  



19세기 초, 20대 여성이 보여준 인생의 통찰이라니. 
다시 읽지 않으면 어쩔 뻔 했나. 
​이 소설을 사랑과 복수의 서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독자라면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또 사족.
발췌문은 아내를 잃고 광기에 흔들리는 힌들리의 울부짖음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이 문구가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축배의 잔을 마시는 자와 내려놓는 자로 갈릴 뿐. 




※ 출판사 지원도서

"내 영혼의 온전한 파멸을 위해서 축배를!" - P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