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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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군주라고 칭하고 가정에서 군림하며 가족들에게 자신을 '과인'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어린 나이에 감금당한 채로 일곱 번의 출산을 겪고 더 이상 욕망도 분노도 없이 신에게 오직 죽음만을 간구하는 어머니. 마치 왕을 모시는 신하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의 부당함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식들. 모든 가족들은 '군주님'이라고 부르는 가장에 대한 복종 이외에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소설은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종교와 민족을 떠나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탄압하는 비정상적이고 부조리한 권력을 강하게 반발하며 비판하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겪어야하는 침묵과 억압의 고통, 교육(혹은 훈육)과 인내심을 명분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가학적 통증과 모멸감을 당연하게 여겼던 드리스는 프랑스인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절대적 존재인 아버지(이슬람 세계의 지배층)에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종과 종교와 성을 차별하고 강압하는 이슬람인보다 근대적 문명을 상징하는 프랑스인에 더 친근함을 느낀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비굴함과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모순,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으로 간 페스에서 마주한 구태와 관습의 부조리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드리스의 혐오는 깊어진다. 더하여 페스로 날아온 막내동생의 사망 소식으로 그의 반항심은 절정에 이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슬람 교리를 멋대로 해석하고 이를 빌미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맹비난하며 그에게 저항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늘 무기력하게 술에 취해 있는 맏아들 카멜과 아버지의 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구경꾼 입장을 자처하는 다른 형제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드리스는 아버지를 향해 신정 통치가 아니라 관용과 자유를 지닌 부성애로서 가족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아버지의 이슬람 신정 통치는 종교적 차원에서도 온당치 않다고 비판한다. 더불어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않고 그저 침묵과 무관심 뒤에 숨어서 복종의 자세만 취하는 다른 가족들도 함께 질타한다. 이 사건은 드리스의 삶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다.  



집에서 쫓겨난 드리스는 자국 땅 모로코 내에서 유럽인에게 차별을 당하는 모로코인의 처지와 모로코 사회뿐 아니라 이방인 사회에서 아버지 핫지 파트미 페르디의 위치가 갖는 힘을 새삼 깨닫는다. 방향성을 잃어버린 반항. 속물적인 세상에서 책상머리의 이론에 그친 '자유, 평등, 박애', '동양 정신과 이슬람 전통과 유럽 문명의 공생'이라는 허위는 이슬람 사회의 기득권층이 지속적으로 악용해 누려왔던 특권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느끼고, 비로소 자신이 현재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드리스의 귀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소설에서 20년이 넘은 가게 건물의 정면을 복원한 얘기가 세 줄에 걸쳐 짧게 나오는데, 페인트칠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문을 살펴보니 경첩이 다 녹슬어 겨우 버티고 있더라는 가게 주인의 말은 당시의 모로코뿐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 빗대어도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구습과 가부장제의 틀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동시에 '과인'이라는 말을 거둔 파트미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간 뒤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아버지와 타협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정신과 '곧 보자'는 선전포고를 마음 속에 담고 프랑스로 떠나는 드리스의 모습은 독립 전 모로코 사회의 혼란스러운 과도기적 모습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단원의 제목들이 독특하다. 드리스의 생물학적이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위치 등 그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 가부장제 관습에 따른 가정폭력의 한가운데 던져진 유년 시절, 프랑스인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그가 겪는 내적 갈등과 반항과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현실적 한계에 따른 각성과 타협 등 주인공 드리스의 모습을 함축적이자 물리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1926년생 작가가 20대 초반에 쓴 소설로써 1950년대에 출간됐다. 초판 출간 이후 현지에서 상당히 이슈가 됐었다고 하는데, 모로코인이면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작가가 이 작품 이후 어떤 글을 써왔을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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