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칭 ㅣ 위픽
이민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2월
평점 :

느닷없이 날아온 메일로 인해 일상의 평정이 무너진 세언이 과거에 한때 관계를 맺었던, 그리고 현재 새로이 관계를 형성한 이들을 하나둘 소환하면서 소설은 '관계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언은 문화원의 강사로서 누군가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과거 누군가의 제자이기도 했다. 학생이라고 짐작되는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폐부를 찌르듯 써내려간 말들은 다름아닌 자신이 과거 학생 시절 그녀의 선생에게 쏟아낸 말들이었다.
각자가 가진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직업이나 신분이 아닌 부모와 자식, 사제, 동료, 친구, 이웃 등 무 자르듯 명확하게 하나의 관계로만 정의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세언이 송하와 서경을 통해 과거의 스승과 자신을 떠올렸듯 우리 역시 자가당착에 빠진 경험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들이 결국에는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는 옛 현인들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문득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저 혼자 부끄러웠던 적이, 나는 무척 많다. 그렇다고해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시의 언행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책을 덮고, 앞으로 말과 행동에 조심을 하자는 생각보다는 품이 커져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청년들의 치기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그들의 절박함과 최선임을,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고지식함이 다가올 나의 모습일수 있다는 거울과 반추가 되기를, 그래서 안전이라는 이유로 미리 관계를 정리하기보다는 이해와 인정의 폭이 넓어지는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원론적인 생각을 해본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