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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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밸러리 솔래너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홍등가 텐더로인에 있는 한 호텔방에서 폐렴으로 죽어간다. 4월 30일, 호텔 직원이 이미 구더기로 뒤덮인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사망 시점은 4월 25일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가는 시작하기 전에 이 소설이 전기가 아니며 그녀의 삶과 저작에 기반을 둔 환상문학임을 밝힌다. 그리고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을 충실히 재현하지도 않았으니 주인공 밸러리를 포함해 대부분 허구로로 간주해야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밸러리를 '너'라고 칭하는 서술자를 둔 2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소설은 밸러리의 시신이 발견된 1988년 4월 30일을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당시에 미국을 흔들었던 굵직한 사건을 비롯해 밸러리의 개인사 등 실제 사건과 허구적 요소가 절묘하게 엇갈리며 독자를 배심원으로 끌어들여 사실(혹은 아직 확인 되지 않은, 어쩌면 확인할 수 없는 진실) 여부를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이 소설에서 밸러리와 대화를 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녀의 망상 혹은 또 다른 자아들이라고 읽혔다.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사실일수도 있고, 밸러리의 착각일수도 있다. 과연 그녀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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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성적 학대와 폭력, 어머니의 방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던 끔찍하고 비참했으며 공포스러웠던 유년 시절. 일곱 살에 처음 친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고, 어머니 도러시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했다. 딸을 돌보지 않았던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바랐기에 소설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밸러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밸러리가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데에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는 단면 중 하나가 아닐까싶다. 


멜름허스트정신병원에서 재차 왜 앤디를 쐈는지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밸러리는, 오히려 여자들이 도대체 왜 총을 쏘지 않는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차별을 강요당하는, 여자의 모든 권리가 공격받고 있는 세상에서 왜 총을 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동시에 남자라는 성을 파괴해야한다고, 앤디를 비롯해 몇 사람에게 총을 쏜 행위를 옳은 일을 했다고 주장하며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쏜 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자수했다는 모습에서 그녀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밸러리는 대학원에 입학해서도 저항자이자 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녀 스스로 만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후 얼마나 고립되고 외로움에 고통스러웠는지, 그래서 오히려 더 강하고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만했던 이유가 소설 곳곳에서 보여진다.   


밸러리의 위악적인 모습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자유를 열망했는지 느껴진다.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유명세를 얻자 곧바로 그녀의 글을 출간하며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세태에 더 절망했던 밸러리는 주변에 어려움에 처한 여자를 비난하거나 비하하지 말고 그냥 도와주라고, 그게 곧 이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이라고, 일갈한다.  


소설의 마지막, 밸러리가 죽음을 맞은 순간은 비록 작가의 상상이라고해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래디컬 페미니즘 내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었다는 밸러리. 그동안 우리는 정작 봐야할 그녀의 모습을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진짜 슬퍼할 거 없다니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니까. 네가 슬프다면 내가 괜찮은 조언을 해줄게. 잠잘 곳도 먹을 음식도 없이 누더기 차림으로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쓰레기통에서 자는 중독자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마약에 찌든 창녀, 노숙자, 미치광이를 집으로 데려가. 지하철에서 걸음을 멈추고 정신병자 매춘부와 얘기를 나눠. 그 여자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악을 쓰고 난리를 쳐도 가버리지 마. 그 여자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필요한 게 뭔지, 뭘 도와주면 좋을지, 노트에 뭘 썼느지 물어. 죽어가는 약쟁이 창녀에게 그리 관심이 많다면 말이다. 호스텔과 정신병원과 빈민가 마약 소굴, 홍등가, 교도소를 찾아가. 바깥에서 세상이 널 기다린다고, 이 친구야. 그 자료의 제목은 ‘그 여자는 사방에 있다‘. - P170

그 여자는 왜 계속 글을 썼을까? 누구든 왜 계속 글을 쓴 걸까? 왜 대학을 떠나지 않았을까? 어떤 여자는 왜 교직에 남았을까? 왜 총을 쏘지 않았을까? 그 여자와 같은 부류의 대다수는 뫠 무기를 손에 넣지 못했을까? 그녀의 모든 권리가 끊임없이 공격당했어. 게으르고 아름다운 그들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정원들을 거닐고 있었지. 그들은 왜 정원을 파괴하지 않았을까? 여성성의 신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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