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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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출간한 소설인데, 우리나라 번역본은 25년만에 복간됐다.  
11세기 셀주크 제국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페르시아의 근현대를 걸쳐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을 매개로 두 시대를 잇는 대서사를 그려낸다. 오마르 하이얌, 하산 사바흐, 니잠 알물크, 빅토르 앙리 로슈포르,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 모건 슈스터 등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에 작가의 상상을 엮은 소설은 벤저민이라는 19세기 인물을 서술자로 내세워 오마르 하이얌이라는 천재 지식인이자 시인을 중심으로 11세기 이슬람 세계와 근현대 격동의 시대에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을 좇아 동방으로 떠나는 벤저민의 여정을 따라간다.   


앞에서 언급했듯 소설의 절반은 11세기, 나머지 절반은 19세기 말~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서술하는데 전반부를 읽으면서 하산 사바흐와 아사신 교단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아사신의 공동체 교리를 읽으면서 이슬람 지하드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왔는데 현재에는 많은 부분이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된 해석으로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19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입헌제(민주제)를 놓고 내분과 더불어 식민제국들의 첨예한 이권 다툼 등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 열강의 전쟁터였던 페르시아의 근현대사를 단편적으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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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여러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부분들이 많지만 일일이 언급하자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쓰기를 아낀다. 실존인물이든 허구적 인물이든 각각의 인물들이 갖는 입체감이 커서 영화로 만들어도 무척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렴결백하고 자아와 신념이 확실하며 돈과 권력의 무상함을 이른 나이에 이미 꿰뚫고 있는 천채 학자이자 고결한 시인인 오마르 하이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실력자로서 제국의 태평성대를 제손으로 이뤄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재상 니잠 알물크,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이스마일파의 부흥을 염원한 하산 사바흐, 당시 여성이 갖는 한계를 뛰어 넘어 제국을 손에 넣고 싶었던 야심가 술타나 테르켄 하툰과 자한, 페르시아의 입헌제와 민주주의를 열망한 파젤, 그리고 조국과 시詩와 벤저민을 사랑한 시린 등 그들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에서는 정치적인 부분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서사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능한 자는 술탄 말리크 샤와 무함마드 알리 샤. 의지나 신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휘둘리며 분노와 자존심만 가진 허수아비 왕. 무능한 사람이 권력을 쥐고 수장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두 인물이다. 그리고 강력한 집단을 만들기 위해 사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두 아들을 참형시키고, 아내와 딸을 내쫓는 하산 사바흐의 공포에 가까운 엄격한 공정함은 과연 그를 따르는 이들의 귀감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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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오마르 하이얌이 벤저민 O. 르사즈로 환생한 게 아닐까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성향이나 삶의 궤적이 닮아 있다. 권력과 부富에 관심이 없고 야심과는 거리가 멀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적 상황에 말려들고, 그들의 권유가 뜻하지 않게 누군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이것이 한 시대에 직간접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완성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과의 운명적 사랑, 그리고 시를 향한 열망까지.   


벤저민은 필사본을 좇아 동방의 땅으로 왔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투쟁에 깊이 관여하게 됐고, 그로인해 친구를 잃었다. 하워드 바스커빌의 페르시아를 향한 동경을 부추기기까지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우발적이고 부차적인 역할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이러한 회의 또한 오마르 하이얌과 흡사하다. 



오마르 하이얌이 유명한 이유는 의학자이자 천문학자요 수학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시詩다. 그가 학문에 매료되는 이유도 학문 속에서 최상의 시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마르 하이얌의 삶이 시 그 자체로 느껴졌다.  


하산 사바흐의 비밀 철장 벽감 안에 있던 오마르 하이얌의 필사본이 800년의 세월을 지나 어떻게 미르자 레자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필사본이 손에 손을 거쳐 이어져왔고, 우리 역시 후대를 이어 삶을 지속한다. 소설은 우리에게 삶과 시의 영속성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것들을 떠나서 일단, 재밌다. 
올해의 소설 목록에 올린다.  




※ 출판사 지원도서

나는 이 도시를 혐오하지 않으리라. 설사 미역 감는 여인이 환영일지라도. 설사 칼자국 난 얼굴의 사내가 현실일지라도. 설사 이 신선한 밤이 나를 위한 마지막 밤이 된다 할지라도.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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