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의 삶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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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 1999년까지의 일기다.  
<바깥 일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책으로써 여기에 실린 글들은 <바깥 일기>보다는 직접적인 일기체이고, 타인의 삶과 일상을 좀 더 깊숙이 사유한다.    






여러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가진 이들의 대화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타인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작가는 몇 분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갑작스레 가까워진 것 같다고 쓰면서 만약 이런 실험을 계속 해나간다면 세계와 그 자신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테고, 어쩌면 자아가 남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리얼리티쇼. 폭탄 테러. 거리의 악사. 연인. 곳곳에서 만나는 평범한 일가족 일상의 단면. 걸인. 전철 안 모녀의 대화.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노동자 지구의 사망 사고와 뒤이은 총리의 희망찬 경제 지수 전망. 예전의 페스트 환자들처럼 거의 다 화장되는 HIV 보균자. 이주민의 향수. 노숙인 자립을 향한 편협한 시선. 봄을 알리는 이웃의 명랑한 어린 형제. 허위로 가득찬 교사의 수업. 고령화와 젊은 육신에 대한 열망. 존엄사.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사람들. 정치인의 가식. 실존의 공포. 노동자 파업. 망자에 따라 죽음을 관조하는 대중의 대조적 감정과 태도. 글쓰기의 윤리. 버려짐과 가난의 무력함. 달라지지 않는 인종주의의 현실. 갈수록 익숙해지는 타인의 고통.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보고 읽고 들은 내용을 기술한 작가의 글들은 한 시대의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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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창고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사이의 몇 권의 일기와 다이어리를 꺼내왔다. 다이어리에는 일정을 꼼꼼히 빼곡하게 적어놨고, 일기장에는 그날 그날의 기록이나 감정들이 쓰여 있었다. 작가의 기록과 다른 점이라면 타인에 대한 관찰은 거의 전무하다. 친구와 직장 동료 등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아닌 이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무렵 나의 생활권에 있는 도시의 풍경은 어떠했던가. 걸인이 있었나? 있었다. 명동 거리 한 복판에 두 다리가 절단되어 음악을 틀고 동전 바구니를 올린 좌판 수레를 밀며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갔던 아저씨, 그리고 강남역 O번 출구의 중간 계단에 어김없이 앉아 있던 아저씨. 전철 안에서 특이한 물건을 팔았던 상인들과 아주 가끔 껌을 팔았던 아주머니.   


어지간한 밥 한 끼 가격보다 비쌌던 크리스마스 시즌 카페의 음료값. 화장품 가게와 식당의 호객 행위.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놀이공원의 긴 줄. 만화가게의 따뜻함.  신문마다 IMF 사태 보도. 실직자가 된 아버지들. 새 정권 출범 후 금 모으기. 세기 말의 긴장과 기대감.   


이렇게 꽤 오래된 지난 기억을 더듬어 쓰다보니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낀다. 포착된 순간을 기록하고 그때 들었던 감상과 생각을 한두 줄에 압축적으로 정리해 써내려가는 이 필력. 거기에 독자의 가슴에 날아와 확 박히는 무심한듯 쓰인 촌철살인의 문구 몇 개.  



작가는 스물두 살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일상의 소소함을 기록하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나는 이와 비슷하게 나의 일기가 나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음이 후회스럽다.   


한 인간의 긴 수명은 대다수의 사람이 살아보지 못했던 생물학적 시간을 지나왔다는 데에 의의를 둘 뿐이다. 작가는 백 세가 넘은 고령자 여성의 죽음을 통해 기록의 의미를 다시 짚는다. 누군가의 기록이 시대의 증언이 될 수 있음에, 그가 짚어낸 의미는 또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사족 
전철의 하차 승객을 기다리지 않고 밀고 들어와 스스럼없이 스낵 봉지를 뜯어 와작와작 소리내어 먹는 여자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의 글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려고 타인에게 주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받으려고 준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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