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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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하고 아름답게 시작한 소설은 미스터리물로 급선회하나싶었는데, 갈수록 독자에게 딜레마를 쏟아내고 있다. 혼란, 진실, 왜곡, 선택, 자기 검열, 소통의 오류, 예술의 윤리성, 예술과 노동, 예술의 상업화 등 읽다보면 여러 측면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무심코 업로드한 그림이 유명 재단의 이사장에게 선택되어 16주간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작가 안이지. 계약 내용 중 가장 큰 특이사항은 창작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한 작품들로 단독 전시회를 한 후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하는데, 소각할 작품은 재단(의 이사장)이 선택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불태워질 작품의 소유권은 작가도, 재단도 아니라는 단서가 붙는데, 이는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빌 모리 사진의 소유권 문제를 상기시킨다.  


로버트 재단은 유난스럽다고 할만큼 정돈되어 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만 할 것같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 지역 전역이 산불과 화재로 북새통인데 재단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 세상이다. 또한 재단의 모든 시스템은 이사장인 로버트에게 맞춰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몇몇 부분에서 인간 독자가 읽기에 빈정상할 수 있겠지만, 인간과 동물의 차별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결국 권력자에게 시스템이 맞춰져 있음(하다못해 문ㅡ물론 작가의 방은 해당되지 않지만ㅡ의 크기까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씁쓸해야하는 지점은 '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웃기지만 웃을 일이 아닌 것은 언어, 즉 소통의 오류와 왜곡이다. 서너 단계를 거치는 통역(이라고 하지만 제멋대로 생략, 누락, 편집에 의한 의역),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류(상여가 슈퍼카라니!)의 확정으로 인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청자에게 와전되어 전달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의사 소통의 혼란을 넘어서 일방적이며 이해를 하려는 노력조차 않는 고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읽다보면 로버트 재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설정들이 있다. 독자는 안이지처럼 '로버트'라는 존재에 대해 의혹을 갖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이지가 그랬듯 천재견을 인정한다(사실 안이지의 말대로 인정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하지만 의문을 거둘 수 없는 점들이 하나둘씩 보이는데, 독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끝까지 안고 간다.   


ㅡ 


우리는 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여 살아야 한다. 일탈은 용납되지 않는다. 시기에 맞는 걷기, 말하기, 성적, 입시, 취업, 결혼 등 안이지가 16주 안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듯 말이다. 소설에서 배달 앱이 나오는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처리를 완료해야하는 배달 앱의 라이더처럼 안이지나 우리나 각자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로버트가 말하지 않던가,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이렇게 쓰다보니 괜히 서글퍼진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독자가 예술과 예술품에 대해 좀더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예술성은 창조되는가, 만들어지는가. 예술은 작품인가, 상품인가. 예술 행위는 노동으로 인정되는가. 예술의 윤리성이 갖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소설 말미에 대니가 주장하는 로버트 재단이 존재해야 하는 목적성은 그가 한 말에 대한 진정성을 떠나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어디에 더 무게를 두냐에 따라 지지하는 방향도 달라질 터다. '로버트'라는 상징성(그런데 로버트만 두고 생각하면 또 못할 짓이고), 아니면 창조적 예술의 확대와 지원.  


마지막 아트 딜러의 말은 그야말로 뜨악할 지경이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위작인가 아닌가.
우리는 왜 진품에 열광하는가.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내 '인생'은... 온전히 나를 위한 '진품'일까?

수없이 버려진 습작들의 가치를, 우리는 모른 척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 출판사 지원도서

그때 로버트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해 보여야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 P149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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