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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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특하다. 내용면에서 조금 기괴한 면이 없지 않고, 네 장章으로 나뉘어진 구성 방식 역시 시기를 달리하며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이십대 여성의 청춘과 방황, 혼란과 불안이라고 선을 긋기에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1장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 아이리스의 정체성과 자아, 그리고 타자와의 경계를 여러 장치ㅡ죽은 사람의 물건, 사진, 병病, 앙복, 스카프 등ㅡ를 통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그려내며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반복한다.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닝 씨, 자신을 타자화해 본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른 O부인, 진부함과 평범함을 참지 못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스티븐, 순간의 포착을 향한 열정과 욕망에 충실한 조지, 결정적인 순간에 비열함을 드러내는 팰리스, 온화함 뒤에 숨겨놓은 마이클의 푹력성,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과 육체적 갈망, 혼란스러운 자아,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몸살을 앓는 아이리스.   


소설의 원제는 'The Blindfold'다. 눈가리개는 마이클이 아이리스에게 선물한 고가의 스카프인데 장난처럼 시작한 눈가리개 놀이가 종단에는 강간 시도와 폭행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아이리스의 다른 자아를 나타내는 양복이나 언어와 소통을 상징하는 속삭임, 그리고 분노와 광기를 대신하는 물기bite, 몽환의 세계로 빠뜨리는 극단의 편두통 등은 현실과 비현실(망상)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안타까운 점은, 아이리스는 누구를 만나든 상대에게 휘둘린다. 모닝 씨의 엽기적인 연구 보조를 할 때에도, 조지의 사진 모델을 할 때에도,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도, 마이클 로즈의 연구조교로 들어가 번역을 맡았을 때에도, 그녀는 늘 그들에게 이입된다. 결과적으로 추락하는 이는, 그들을 향한 믿음이 무색하게 뒤통수를 맞는 아이리스다. 


아이리스가 마이클에게 끌렸던 이유는 아마 다정함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낯빛을 살피며 밥 한 끼를 사주는 사람의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 같다(그런데 그 마음에 재를 뿌리다니!). 적어도 시크한 척 뒤늦게 "옛다, 사랑!"하고 내뱉는 조지의 고백같지 않은 고백보다야. 



소설의 마지막, '지옥에서 내빼는 박쥐처럼 죽도록 내달'린 아이리스가 향한 곳은 어디일까? 그녀가 비록 도망쳤지만, 희망적인 것은 어느 순간에도 아이리스는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도망쯤이야 어떠랴. 
도망을 가면 돌아오는 날도 있으리니.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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