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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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쪽의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읽으면서 내내, 시종일관 좋았던 소설이다. 책을 덮고 20여분 가까이 그 여운에 말없이 차만 마셨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와 이 소설에 대해 종알종알 떠들고 싶었으며, 그 다음에는 작가가 궁금해졌다.  


일단 이 소설의 백미는 유려한 문장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를 뻔하지 않게 서술하는데, 많은 문장들이 필사를 하고싶을만큼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기(나이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를 지나왔거나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법한 무엇들이 자연스럽게 읽는 이에게 스민다. 








레오는 배울만큼 배웠지만 불안해 하고,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에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방황하는 젊은 엘리트다. 그는 침묵에 익숙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주변 상황에 녹아드는 게 편하다. 몽환적이고 즉흥적이며 어딘가 이질적인 아름다운 아리아나는 걱정에 짓눌려 예민하며 강박 증세까지 있다. 작은 상처에도, 잠을 자다가도 죽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인생이 늘 되풀이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렸던 이유는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며 자연스러운 세상사의 일부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사랑은 그저 두렵고 위태로운 감정이 아니었을지, 그래서 레오의 고백에 아리아나가 강하게 부정한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랑을 고백한 레오 역시 자신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겪어보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바보같다고 말하는 아리아나는 안정감을 핑계로 세상물정에 녹아들어가 감정을 잃어가는 나이듦을 혐오한다. 언니 에바가 남편을 닥달하며 제 성에 차지 않자 이혼한 것도, 로마에 오기 전과는 다르게 성마른 성격으로 변한 것도 다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불안과 구질구질한 것들에 초연할 수 있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아리아나가 갖는 모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극도로 예민한 그녀가 갈구하는 안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일 것이라 짐작한다.   


레오의 친구 그라지아노는 자신을 포함한 레오같은 사람을 세상에서 '멸종된 종'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이 돌아가는 궤도에 올라타지 않은 자신들을 아예 인류의 별개 종種이라고 칭한 것이다. 레오는 정규직 제안을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입사를 결정한 것에 대해 '투항'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안정을 찾아 부자 예술가와 결혼을 결심한 아리아나를 보면서 평온하지만 사진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는듯 바라본다.  


오랜만의 재회에 아리아나는 마치 오늘 하루만 살 사람처럼 닥치는대로 돈을 쓴다. 그녀는 지루하고 따분한 매일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리아나의 모습은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싶다. 


ㅡ 


계산적이고 즉흥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정 소모와 피로, 대도시의 황량함과 고독. 혼자 있을 때보다 집단에서 더 커지는 외로움과 소외감. 꿈과 사랑, 소박한 즐거움에서 행복해지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다짐하고 또 다짐한 삶은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와 고단함에 생명력을 잃어 '살아가는 것' 자체에 지쳐간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두려운,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왜 살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소설 초반, 레오와 아리아나가 달라져 가는 세상에 갖는 아쉬움들은, 유리병에 든 우유를 못 마시게 된 것, 서점의 책들이 비닐에 싸여 읽을 수 없다는 것, 사라져가는 종이 봉투, 오랜 가죽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 등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다시 생각났다.  


레오는 당부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갖기를.
이 얼마나 아픈 말인가.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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