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일지 열린책들 세계문학 285
다니엘 디포 지음, 서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1664년 9월부터 약 1년여의 전염병 기간 동안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전염병 사태를 두고 어떠한 대안이나 개인적인 생각을 서술하지 않고, 심지어 화자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기껏해야 한두 줄로 슬프다, 끔찍하다 정도). 개인적 묵상이나 소신은 다른 이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드러난 상황과 화자가 경험하고 본 것들을 사실 그대로 적어나갈 뿐이다. 전염병에 의한 사명자 수 집계, 페스트 창궐에 따른 사회 현상, 정부 및 공공 기관의 대처, 의료진의 노고와 헌신, 새로운 법령 제정, 정부의 법률 시행에 따른 시민들의 반응, 시스템의 오류와 부작용, 전염병 시기의 산업 실태, 대규모 실업난, 생계 절벽, 전염병 기간 동안의 일상 생활 풍경 등을 여러 사례와 더불어 표와 목록으로 나타내 서술한다.  







작가는 화자의 입장이 되어 유성같은 천체 현상이 전염병, 화재, 전쟁 등의 전조나 예언으로 보았고 미신과 그에 따른 터무니없는 망상이 사람들을 더 공포로 몰아넣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한편, 앞서 자신의 피난 여부를 두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신에게 의탁하는 것이나 비아냥대는 남자에게 페스트가 하느님의 벌이자 신의 섭리라고 말하는 모습, 그리고 끊임없이 신의 자비와 신을 향한 섬김을 확신하는 태도는 과학적 접근에서 벗어난 그의 한계를 나타낸다(아니면 17세기라는 시대의 한계일 수도 있을테고).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신에게 기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인류애이자 사랑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가혹한 시대에 신조차 없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나. 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전염병의 종식 자체가 신을 증거하는 것이었을테다. 



전염병을 악용해 도둑, 사기꾼, 협잡꾼 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개를 친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거짓말쟁이들의 처방에 기대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그 두려움으로 인해 기행을 거듭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록 의무에 따른 행위일지라도 헌신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화자는 이에 대한 많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는데, 작가는 이들에게 크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표처럼 그저 보여지는 사실을 적어내려가기만 한다. 어쩌면, 감시 하에 격리되어 있는 병든 아내와 자식을 만나지 못하고, 거짓 소문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며, 때때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연민조차 사라진 이 시기에 살아가고 죽는 것에 무슨 서사가 필요있겠느냐고 말하는 듯 하다.   


ㅡ 


책에는 위기 상황 대처에 관련한 관리직 임명과 전염병에 관련한 법령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환자 고지 - 감염자 격리 - 환기 소독 - 주택 봉쇄 - 이동 금지 - 격리 병원 운영 - 시체 매장', '부랑자 관리 - 공연 및 연회 금지 - 술집 영업 제한', 이외에도 외출 및 접촉 자제, 비상 식량 및 생필품 비축, 소독제를 넣은 향수 구비 및 휴대 등 감염병에 따른 사회 시스템 작동은 기술과 방식의 차이일뿐 17세기나 21세기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시대에도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의 죽음에 대부분 무덤덤해진다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각종 범죄를 들어 윤리적 문제를 지적한다. 감염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위로 약탈하고, 환자를 상대로 강도와 살인 행각을 벌인다. 인간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도덕도 무시한 채 치안이 불안정한 시기를 노려 폭력과 야만과 탐욕을 드러낸다.  


사실 이보다 더 눈에 띄는 점은 소설 속에서 안전을 권리로 내세운 피난민과 안전을 의무로 내세운 순경의 대치처럼 각자의 입장에서 내세운 권리와 의무가 관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에 대한 연민과 공동체의 안전, 어디에 무게를 두겠는가(물론 위에 썼다시피 작가는 이러한 지점에서도 개인의 소견이나 고민을 피력하지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감염자가 자신의 상태를 알고도 비감염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의도적 살인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한 소문들은 무증상 감염자들에 의해 와전된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화자가 인간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도덕성에 희망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과학적 검사 없이 무증상 감염에 대해 생각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ㅡ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이 작품은 전염병 시기의 영국 사회와 인간들의 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우리가 얼마전 겪은 팬데믹 시기에 소설이나 영화에서 있을 법한 일을 실제로 겪었다면, 이 소설은 허구라는 장치를 이옹해 실제화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이자 기록자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화자는 삭막할 정도로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한다. 그의 초점은 인간과 교회(신앙), 도시와 사회에 맞춰져 있다. 삶과 죽음의 방식, 가족에 대한 사랑, 타인을 향한 연민과 애도, 탐욕과 이기, 혼란의 시기에 묵묵이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존재하는 참혹해진 도시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바라본다.  



화자는 여러 헛소문에 대해 단호히 부정하면서 런던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모든일이 처리되고, 시 전체와 외곽에서는 치안과 질서가 놀랍도록 유지되고 있으며, 전염병 시기를 감안할 때 전 세계의 도시들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통치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격리나 봉쇄 등 시민권을 유린한 행위는 비상시기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짚으며 행정관들을 비롯해 시체를 옮기고 매장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염병 사태에 관련해 여러 분야에서 업무를 맡았던 이들의 노고를 열거하며 치하한다. 


화자는 자신이 남기는 글을 그의 행동의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같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 비슷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지침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이런 당부를 썼다는 것은 작가가 앞서 쓴 이유로 런던 시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니얼 디포가 영국 리얼리즘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를 확인하는 소설이다. 서술하는 자가 가능한 한 감정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써내려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읽는 입장에서도 이 기록들을 비교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감정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회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반목과 갈등, 가난한 민간인의 죽음에 갖는 안타까움과 인류에 대한 희망, 그리고 결국엔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마침내 '살아남았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교차하는 여러 감정과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