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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평점 :
일본 전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ㅡ가와바타 야스나리(젊은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아베 코보 등ㅡ의 작품을 읽다보면 비슷한 선상에 있는 감정선들이 목격된다. 1954년에 쓰여진 이 소설 역시 패전 이후 피폐해진 젊은이들의 고독,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요한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은 네 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고, 1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시인 '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각 장마다 시오미의 죽음, 그가 남긴 두 권의 노트에 담긴 내용, 그리고 화자 '나'가 시오미의 글을 읽은 후의 얘기가 담겨 있다.

요양원에서 보여지는 서른 살 시오미는 삶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마치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것처럼. 시오미는 예술가로서의 생명력과 삶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나'가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미래가 없는 그저 하루하루를 끝내고 죽음을 기다리는 게 전부인,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진짜 삶이 아니라면서 살아있음이란, 내면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불타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은 것인데 자신은 그런 황홀감을 못 느끼고 있으니 죽은 거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입원 환자 7백 명이 병원을 나가는 길은 병이 나아서 정문으로 나가든지 죽어서 영안실로 가든지 둘 중 하나인 요양원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죽음 앞에서 이토록 초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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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푹 빠져 있는 열여덟 살 시오미는 사랑에 의해서만 인간은 지상의 고독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랑지상주의자다. 후배 후지키를 향한 동성애적 감정, 사랑을 잃은 상실, 그리고 한 여인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러나 그의 사랑은 늘 일방적이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순수와 경외를 향한 그의 사랑은 때때로 부담스럽다.
시오미는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는지,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자각하며 붙잡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쏟아져내리는 절망과 분노와 허탈과 체념 사이를 방황했다. 시오미의 불안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죽음의 공포보다 삶에 대한 불만이었다. 시오미가 영장을 받고 느꼈던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보다 누군가를 죽여야한다는 점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만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가, 사랑을 거부당하고 이와는 정반대적인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야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 숨은 쉬고 있으나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시오미는 부유하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순수 청년 후지키는 어떤가. 그는 스스로를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자격이 없기 때문에 시오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그런 책임을 진다는 것이 두렵다고 자조한다. 후지키는 심지어 부모의 사랑조차 보답하지 못할 것 같아 부담스럽고 힘에 겹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진지한 감정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해 사랑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으니 혼자 있기만을 바란다. 이렇다보니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말라는 시오미의 간곡한 부탁 역시 후지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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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노력이고 의무인 요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는 시오미.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은 전부 젊은이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전쟁과 가난과 질병 뿐이다. 시오미와 더불어 함께 생각해본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어떤 청춘 시절을 보냈을까, 그들은 그 청춘을 즐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삶의 기쁨을 알았을까.
시오미는, 인간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더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어내고, 대의 명분을 내세워 대량 학살을 용인한다고 말하며 이것이 과연 문명인가, 저주인가, 묻는다. 인간의 지혜가 살상 무기를 고안해내고 전쟁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런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더 이상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없는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이 모순의 끝이 있기는 한 걸까.
군국주의 시대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과 인간성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은 한심하고 무용한 존재였을 것이다. 개개인의 다름이나 개성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강인한 남성성을 우선하는 시국에 하나의 이념만 좇으며 살상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 갈 곳을 잃은 이들에게 전쟁터의 총알만큼이나 쏟아져 내렸을 자괴감과 상실감의 무게는 상당했을테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전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시오미가 향할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었으리라.
소설 초반에 화자 '나'는 자신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시오미 시게시, 오로지 이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서임을 밝힌다. 아마도 이는 시오미뿐 아니라 전쟁과 패전 후 소리없이 살다가 떠나간 청춘들을 기억해달라는 애상곡이 아닐런지.
문득 지금 이 시각을 살고 있는 청춘들,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랄까...... . 그리고 나는 시오미와 후지키의 나이였을 때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가. 어쩌면 한 방향으로 달려야만 하는 현재의 청춘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