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파랑
기 드 모파상 지음, 송설아 옮김 / 허밍프레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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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 소설 네 편이 실려있다. <사랑>을 제외한 세 작품은 풍자와 해학, 유머와 위트가 소설 전반에 흐른다.  



사냥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암컷 오리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컷 오리. 
이시도르의 일탈이 과연 방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 천진한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
무슈 파랑의 복수, 그 이후가 궁금하다. 





 



책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눈에 그려져 웃음이 절로 나온다. 특히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과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는 영국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적대감, 종교와 신앙심에 대해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인간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익살꾼 사보는 교회와 신부를 싫어해 평소에 얄미울 정도로 신부를 놀림감으로 만든다. 그런데 큰 공사비가 걸린 교회 보수 사업이 시작되자 돈 욕심에 자존심을 버리고 신부를 찾아가 그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파상은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에 인간 사회가 갖는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넘치는 화술로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요된 정조를 지키는 처녀를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위송 부인의 의도 자체, 그리고 청년 이시도르의 탈선(?)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  



<무슈 파랑>에서는 유년시절부터 그를 키우고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켜준, 한마디로 어머니와 다름하지 않으며 폭군에 가까운 늙은 가정부 줄리와 제 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인 아내 앙리에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 여자 사이에서 지레 죽을 판인 파랑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도 해학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독자는 아들 조르주의 친부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파랑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진실을 알든 모르든 각기 다른 이유로 의심과 고통에 짓눌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갈등은 치정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여러 갈래에서 맞닥뜨리는 딜레마다. 파랑은 이 문제를 두고 20년 가까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끝까지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가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긴 세월 동안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가 이에 대한 혜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다보면 '이렇게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진실을 알고말지' 싶은데, 문득 얼마 전 온라인 북클럽에서 어느 분이 '천성'에 대해 한 말씀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성정이라는 게 사람마다 있으니 파랑도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더 당황스러운 건 아내가 유책 배우자인데 파랑이 생활비로 매달 만 프랑을 지급한다. 그것도 외도 상대 남자와 함께 사는 아내에게)도 들고. 어쩌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고. 


아무튼 파랑은 자신이 비극적 폭탄을 맞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한다(이성적으로 말하자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을 상대로 고통받지 말고 당신의 삶을 살라고 말해야겠지만, 파랑의 복수에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조르주는 아무 잘못이 없다만). 복수 이후 파랑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그려지지 않는다. 독자가 그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에서 데이지(위대한 게츠비), 키티(인생의 베일), 이디스(스토너)를 능가하는 비호감 캐릭터가 등장한다. 파랑의 아내 앙리에트. 그녀가 파랑과 결혼을 한 이유만으로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닌데, 한 술 더 떠 파랑이 자신을 돈으로 샀기 때문에 짜증난다고 말한다(파랑의 입장에서 그런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파랑의 '선의'가 어리석음이고, '신뢰'가 갑갑함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증오한다고 소리치는데, 이는 결국 질투는 고사하고 아내의 외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그의 무신경과 멍청함에 화가난다는 것이다. 죄의식은 고사하고 이런 사고회로는 어떻게 하면 만들어지는지... . 파랑과의 결별 이후 소설에서 간간이 보여지는 앙리에트 삶의 모습은 괘씸하지만 제 살 길을 잘 찾아갔다는 점에서 파랑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모파상의 소설은 권선징악과는 거리가 멀다).


ㅡ 


네 편의 소설들은 모두 1880년대에 쓰여졌다. 당시의 시대성을 감안해도 인류가 마주하는 정서와 고뇌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주는 상처, 진실된 사랑, 이해와 공존에 대한 의식 등 삶이 지속되는 한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그리고 기억해야 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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