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엘리자베스 하드윅 지음, 임슬애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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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6월이다. 당분간 무엇을 하며 살지 정했다. 바뀌어버린, 심지어 뒤틀려버린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지금 살고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첫문장)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편지, 독백, 유추 등의 형식으로 써내려간다. 화자는 1인칭 시점의 '나'인데, 작가 엘레자베스 본인을 소환한 듯 보인다.  


소설은 엘리자베스의 가족, 동료, 친구 외에 지인들 혹은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건너건너 말로만 들었던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직업, 인종 및 국적, 사회 계층도 저마다 다 다르고, 화자가 추억하는 기억의 장소 역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소중한 친구 M을 시작으로 후아니타, J, 주디스, 미스 크레이머, 알렉스, 라일, 마리, 루이자, 닥터 Z와 시모너, 조젯, 아이다, 안젤라, 마이클, 미스 라보어 등등. 


보스턴, 뉴욕, 암스테르담, 또다시 뉴욕. 
1940년대 뉴욕, 52번가의 비밀스런 재즈 클럽, 재즈와 트럼펫, 그리고 진심어린 허무주의, 할렘의 거리.  



소녀 시절 성인 남성과의 교제를 통해 터득한 기브 앤 테이크의 이치, 지역 교사 자격증 취득, '타락'이라는 단어조차 달콤했던 소녀 시절, 어린 시절의 유원지 댄스장, 학창시절의 댄스파티, 경마장의 기억, 장난스런 포옹과 댄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불면의 밤, 이혼, 권태, 질투, 상실과 아픔, 흔들리고 슬프고 격렬한 중년의 나날들, 그리고 뉴욕의 서재. 


가정 살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매춘을 하고 결국 성병으로 죽은 아가씨,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숨기고 살아가는 교사들, 파도와 같았던 어머니의 여성성,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았던 알렉스의 삶의 목적, 가정 폭력과 근친 강간과 난치병이라는 불우함 속에서도 지켜내야하는 것들을 지켜내려 하는 조젯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 오랜 시간 지켜봐온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만의 상상을 통해 인생을 고찰하고 사유한다. 


냉철한 지식, 삶의 미완성, 사라지는 희망, 독신과 결혼, 홀로 살아가는 삶, 여행, 도시, 예술, 노동, 관능, 청춘, 부모와 가족, 무심과 무감, 인내, 삶의 결핍, 부부 간의 사랑과 헌신, 불륜, 지옥에서의 생존과 그 이후의 삶, 가족의 죽음, 은퇴, 새로운 삶의 시작. 


우리네 삶에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파도들을 하나하나 맞닥뜨리며 실망하고 체념하며 상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다시 사랑하며 손을 맞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그러니 서로를 연민하며 살아가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1916년에 태어나 이 소설을 예순세 살에 출판했고, 91세에 별세한 작가. 아흔의 작가는 삼십여 년 전의 자신의 사유를 어떻게 생각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책을 읽다보면 간혹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는데 이 분이 그랬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이 툭툭 내뱉는 문장들 하나하나 공감하지 않은 문장이 없었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에서는 문장 하나가 사진 천 장을 대신한다'라고 평했는데, 개인적으로 책의 표지처럼 문장들이 별가루 같았다.



p18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고통.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위장할 뿐, 형용사의 날개를 달고 도망칠 뿐. 문단의 끝에서 단검에 찔리는 것은 달콤하지. (...) 다 잊어버리고, 나는 아끼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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