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서 온 언어
미즈바야시 아키라 지음, 윤정임 옮김 / 1984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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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부터 저자는 왜 그토록 프랑스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어 했던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본인이 자문자답한다. 1970년대 일본 대학가는 여전히 정치가 큰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고, 68사태의 후유증은 대학에 잔혹한 모습들로 남아 있었다. 대학생인 저자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말들의 공허함이었다. 생기 잃은 단어들, 속 빈 문장들, 실체 없는 말들이 번식하며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온갖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말들, 대형 광고판에 쓰인 어휘들, 전단지에 인쇄된 담론들, 이러한 것들이 일상의 언어를 구성했고, 저자는 그 모든 것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 부분이 책의 초반부에 서술되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감했다. 








그는 보편화된 언어 인플레의 느낌에 쫓기고 있었고, 도피의 선택지이자 유일한 타계책이 프랑스어였다. 저자가 프랑스어를 좇게 된 결정적 사건은 일본의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 모리 아리마사의 저서 <노트르담 멀리에서> 나오는 '경험'에 대한 글이었다. 진정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글이 그에게 격동을 일으켰다는데, 사실 이 부분이나 이후에 서술되는 언어와 음악에 대한 얘기들을 읽으면서 저자의 기질적인 면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싶다.  



어린 시절 내내 들어왔던 형의 음악은 저자를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어로 이끌었다. 형에게 음악이 그렇듯, 프랑스어는 저자에게 부성父性의 언어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훈련의 대상이자 작업의 대상,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음악이었다.  


십대 후반,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듣고 또 들었던 저자. 그의 프랑스어에 대한 사랑은 모차르트에 대해 지녀 왔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 그 사랑에 의해 부양된 것이다. 그가 모차르트, 특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일까? 모차르트의 중간적 위치, 그리고 모짜르트가 존재와 외양 사이에 가식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하녀이면서도 귀족과 성직자를 상대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수산나에게서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글의 후반부에 수산나에게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서문을 시작으로 2부에 접어들기 전까지 불현듯 떠오르는 음악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이었다. 듣는 것으로나 연주하는 것으로나 베토벤 소나타 중 가장 아끼는 곡인데,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함께 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면 좋았으련만 독서 중에는 가사 있는 음악은 사양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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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프랑스 - 일본 - 프랑스 - 일본으로 이어지는 언어적 이방인이 쓴 이 에세이는 조금 독특하다.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이중 언어 환경에 내몰린 것도 아니다. 모국어에서 느껴지는 한계를 타파하고자 스스로 앞으로 살아갈 언어를 선택했다. 저자는 장 자크 루소와 장 스타로뱅스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거래에 속하는 온갖 가치들은 인간 존재의 진정한 개인성을 은폐한다는 이유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현대 사회의 만연한 언어 인플레 속에서 기만당하는 인간의 고통을 얘기한다. 정지된 단정적 사유나 분명한 관념들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노력, 이탈과 유배의 노력이 중요하며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지향하는 바다. 


저자는 중도, 중개적 상태, 불완전한 중간을 좋아한다.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상태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상태의 온갖 구성적 특징도 아직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뿐 아니라 그가 일본과 프랑스라는 중간에 있는 실질적 위치와도 연관있어 보인다.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구어口語일 뿐만 아니라 문어文語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구어체 프랑스어에는 뭔가 자연스러운 면이 결여되어 구어의 차원으로 적절하게 흘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꾸준한 의식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서른다섯 해 만에 자연스러워졌음에도 자기 검열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책으로 만난 저자는 모국어 정체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언어를 선택해 가족 공동체의 언어로 정립해가는 과정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쉰여덟 살, 그의 인생의 삼분의 이를 프랑어로 살아 온 저자는 더 이상 민족지적인 의미에서 일본 공동체에 있지 않다고 느끼고, 국적의 소속에 따라 그가 규정되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 깊숙한 곳에서 태생적 언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긍정한다. 물론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에 머문 기간은 고작 7,8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원적 영토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저자는 스스로 일본인도 프랑스인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에게 이방인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타자의 관점으로 관조하는 언어로 인해 프랑스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어에 대한 애착도 느낀다. 그에게서 프랑스어가 사멸할 때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는 말에서 저자의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과 자신이 부여한 정체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유년의 형상인 일본어, 분신의 형상인 프랑스어. 말, 그리고 언어가 갖는 힘에 대한 찬사. 언어는 단순한 말을 넘어서 삶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일임을 이 책을 통해 느끼고 저자의 감정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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