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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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리는 법에 따라 우리가 죽이는 무고한 이들을 기록해야 한다. 





 


 
지구 밖에 건설한 식민 행성의 재난으로 인류는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지구라는 유한한 세계에 갇힌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인구 수를 조절하는 것. 그래서 죽음을 독점하고 배급하며 관장하는 수확령이 만들어졌다.  


2042년, '클라우드'는 '선더헤드'로 진화했고, 세상의 모든 정보가 선더헤드의 무한에 가까운 메모리 속에 담겨 누구나 접속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죽음을 정복했다. 무한한 지식을 얻었고, 불사의 삶이 가능해진 완벽한 세상에서 개선은 필요없다. 교육도, 연구도, 배움도 모두 불필요해져버린 세상. 


인류의 가장 큰 성취는 죽음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행정부를 끝장낸 것. 선더헤드가 정치가 아닌 행정을 도맡자 부정부패가 사라졌다. 생태와 공존을 기반으로 한 세계법이 정립됐다. 다만 인구 조절을 위해 사람을 죽여야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선더헤드에게 권위가 넘어가지 않은 조직은 수확령, 단 하나뿐이다. 인간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을 기계한테 내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수확자의 일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선택되는가.
수확자가 될 첫 번째 조건은 수확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 직업의 역설은 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즉 살해하기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확자들 본인도 그들이 죽이는 이들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동시에 유죄임을 안다. 수확자는 죽음의 도구일 뿐이고, 도구를 휘두르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죽는 '그'가 아니면 내가 죽을 수 있으므로. 따라서 모두가 공범이며, 그 책임을 공유한다. 


수확자는 경외의 대상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다. 수확자의 지위는 법 위에 있지만, 법을 거역하고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법 규칙을 넘어서는 도덕성을 요구한다. 수확자 수습생은 역사, 철학, 과학을 공부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책임을 맡기 전에 생명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깨우치며, 수확자에게는 겸손, 청렴이 강요된다. 보편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많은 배움의 양을 요구하는 수확자 수습생. 


문득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현재 세계 곳곳의 정치인들에게 주어진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확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과 요건이 남다른 도덕성이라지 않은가. 


수확자라는 직위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그리고 선더헤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확자들은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들이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수확자가 받는 징계는 마치... 시시포스 같더라. 



법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둔다'라고 표현하며 수확자들이 사회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봉사를 한다는 사실을 어린시절부터 교육시킨다. 수확자들의 기록은 왜 인간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를 증언하는 공공 기록이다. 그 기록에는 행동뿐 아니라 수화자들의 감정도 기록한다. 그들에게도 회한, 후회, 슬픔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과 다를 게 무언가. 


수확자들은 권력과 폭력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경계한다. 그리고 좋은(?) 수확자들은 자기 일을 좋아하게 될까봐 우려한다. 아무리 합법적이라고 해도, 고결한 명분이 있더라도, 무작위로 선정한 사람을 죽이는 트라우마는 그들을 늘 괴롭힌다.  


수확령은 세계에서 유일한 자치체제다. 선더헤드는 수확령에 간섭하지 않지만, 세상에 존재해야 할 수확자의 숫자는 제시한다. 전 세계에서 연간 약 5백만 명을 거둔다. 수확 시대 이전의 사망률에 비하며 극히 적은 수치다. 여기서 독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합법적 '살해'가 범죄와 사고로 인한 죽음의 수치보다 적다면 수용할 수 있는가?


ㅡ  


소설의 시작에서 등장하는 패러데이처럼 의무보다는 연민을 선택하는 숭고한 수확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초능력 꼬마 소녀가 밀폐된 공간에서 수 마리의 늑대를 상대로 잔혹한 핏빛 대결을 벌였던 영화 <마녀>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로언의 훈련 장면에서 보여지듯 고결한 소명을 폭력과 살인 욕구를 분출하는 데 이용하는 빌런 수확자도 있다. 수확자 수습생을 선택하는 과정이나 수확자가 수확을 거부하는 부분에서도 잔인한 딜레마가 따라온다.  


수확령에서도 사소한 다툼이 있고, 부패와 규정을 악용하는 사태는 갈수록 잦아진다. 정의와 고결한 소명을 혐오하고 적대시하고, 연민과 관용을 약점으로 보며, 수확자가 새로운 군주이자 권력자라고 믿는 자가 있는 한 수확자의 허울을 쓴 살인광은 언제든 나타날 것이다. 이미 초창기부터 수확령의 폐해를 우려한 최초의 최고위 수확자 프로메테우스의 예감이 과하지 않은 이유는 수확자, 그들이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패러데이는 두 제자에게 '절대 인간성을 잃지 마라'고 말했다. 인간성을 잃으면 살해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되므로.  



그동안 읽어왔던 미래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기존 작품들이 기계화, 인간성 상실, 인공지능의 장악 등 대체로 현대 사회를 반추하며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부각했다면 수확령이 인간의 목숨을 거둔다는 설정을 제외하면 오히려 외형상 유토피아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완벽한 세상에서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라져가는 앎을 향한 열정과 지적 욕구,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부재. 


죽음이 당연한 운명이 아니라 예외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끝도 없는 회춘을 거듭하면서 수백 살을 살면서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선더헤드는 모두가 동등한 재산을 갖게 할 수 있음에도 인간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어느 정도 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분투할 수 있도록. 또한 선더헤드는 수확령을 간섭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걸까, 경멸하는 걸까? 인간이 아닌 디지털에게서 당하는 경멸과 무시는 어떤 기분이 들게 할까? 


선더헤드는 빌런이 아니다.
그런데 왜? 기분이 별로... .



이 미래소설은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원초적인 것들이 성취된 후에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인구 조절 문제로 인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거둔다는 설정만 제외하면 여러 면에서 정치, 행정, 복지 등 완전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떤 구조적 환경에서도 인간의 악의와 선의는 대치하게 마련이고, 이를 군더더기 없이 흥미롭게 그려낸 듯 하다.  


세 권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각 권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성되어 깔끔하게 마무리된 점이 좋았고, 사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수확자 퀴리의 「수확 일기」 였다. 몇몇 수확자들의 일기가 등장하는데, 독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지점이다.  


끝으로, 무조건 재밌다. 




170.
평균 나이가 1천 살에 가까워지면 삶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우리 모두가 모든 예술과 과학에 능한 르네상스의 아이들이 될까? 숙달할 시간은 충분하니 말이다. 아니면 지루함과 독창성 없는 일과가 지금보다 더 우리를 좀먹어, 무한한 삶을 살아갈 이유가 줄어들고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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