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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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드를 화자로 둔 소설은 중년이 된 라시드의 현재 시점으로부터 레하나와 피어스의 사랑, 60여년의 시간이 흘러 아민과 자밀라의 사랑을 과거에서부터 서술한다. 2부를 거의 다 읽어갈 동안 도대체 1부와 2부가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60여년 괴리의 의아함은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1부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소설은 식민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을 앞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식민주의의 폐해나 비판이 소설의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지으며, 무겁게 다루지 않을 뿐더러 유럽인과 원주민의 대립 또한 수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간 이들에 대해 이야기이자, 잊혀져버린 그들에 대한 기록이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기록은 그들이 한 때 살아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특히 3부에서 런던으로 유학을 간 라시드의 경험과 깨달음은 작가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교편을 잡은 이유를 대변하는 듯 읽힌다. 


1부에서 버턴에 의해 나타나는 영국의 식민주의와 종교 및 인종 비하, 그로인한 식민주의를 과학적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인도인과 아프리카인들에게 가해지는 복종과 노동을 인류애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보이며 야만적인 대륙과 토착민의 번영과 질서를 위해 유럽인 정착민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를 상징한다. 문명화를 위해 살인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 이미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써 살인하는 것과 다름하지 않으며 원주민들은 충분히 원시적이기에 간섭하지 않고 그냥 두어도 알아서 죽을 거라는 주장. 어떤 주장이든 백인, 특히 유럽인을 제외한 사람을 인간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유럽인과 기독교인이 그들 자신을 제외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백인 사냥꾼들이 잔혹하게 도륙하는 아프리카 동물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있음을, 새삼 충분히 알 수 있다. 


라시드가 영국에 온지 1년 뒤인 1964년 고국 잔지바르에는 신정부 전복 사건이 발생한다. 언론 매체에는 폭력과 학살이 연일 보도되고, 아버지의 편지에는 끔찍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돌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오로지 공부에 몰두했던 라시드의 모습에서 작가가 자신을 투영했음을 독자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아민은 '우리가 복종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지배자들이 감독하지 않아도 노예 같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아민이 말하는 '지배자'는 단순히 강대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와 이념으로 박해당했던 사람들,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그릇된 관습과 편견과 차별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레하나와 자밀라를 떠올려보면 '지배자'의 범위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고통과 두려움을 가족과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죄책감, 부모를 원망하며 그들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죄책감. 남은 자도, 떠나 있는 자도 외롭고 괴롭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이러한 시대의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의 심정으로 살아내야만했던 수많은 이들의 서사를 네 남녀의 사랑을 통해 보여준다. 자밀라를 잊지 못한 채 외로움과 공허함이 끝나기 때문에 다가올 죽음이 행복하다는 아민의 말이 왜 이렇게 헛헛하게 울리는지. 


배반이란 무엇을,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레하나를 저버린 아자드와 피어스일까, 아니면 관습과 가족의 강요을 극복하지 못하고 복종을 선택한 아민일까, 그것도 아니면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던 라시드일까. 


나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소설에서 그리지 않은 두 형제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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