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바디 - 모든 몸의 자유를 향한 투쟁과 실패의 연대기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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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거대한 기만이 숨겨져 있다."
(빌헬름 라이히)



이 책은 올리비아 랭이 프로이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고 전 생애를 몸과 자유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바친 분석가이자 사상가 빌헬름 라이히를 안내자로 삼아 20세기를 관통하면서 같은 세기를 살아온 사상가, 활동가,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 고찰한다.   


라이히의 삶에서 올리비아 랭을 매료시킨 점은 그가 질병과 성, 저항과 감옥 등 몸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한데 끌어모으는 연결자 역할을 한 방식이었다. 자유가 의미하는 것, 자유의 보호나 축소에서 국가의 역할, 몸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혹은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 획득의 가능성 등에 대한 논제는 보이지 않는 통제와 처벌의 시스템을 폭로함과 동시에 대중이 각성하는 역할을 한다. 








 
라이히가 빈에서 치료하는 환자들 중에는 노동계급이 많았는데, 그들의 사연을 통해 정신적 불안은 어린 시절에 겪은 결과만이 아니라 가난과 열악한 주거 환경, 가정폭력, 실업 등 사회적 요소들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이히의 연구 주제는 '몸을 수치감의 대상물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고 달성할 수 있게 할 연대감과 힘의 연원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구'였다. '성 정치학', '성 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든 빌헬름 라이히. 페미니스트 앤드리아 드워킨에 따르면, 그는 '성 해방론자 가운데 강간을 진심으로 혐오한 유일한 남성'이었다.   


스승인 프로이트가 인간의 정신에 촛점을 맞췄다면 제자인 라이히의 관심은 인간의 정신과 기억을 담는 몸이었다. 성에 있어서 급진적인 견해를 구축한 프로이트도 동성애 욕구를 미성숙과 일탈이라는 기준에서 보았다. 라이히는 인간이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고, 욕망을 부정적으로 주입받고 억제 당하며, 자유롭고 안전한 표현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미성숙한 상태로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에 반해 성적으로 만족한 인간은 불안에서 해방된다고 정의했다. 그는 의무가 아닌 욕망의 성적 접촉을 통해 인간이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라이히가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원인'을 다루는 것이었다. 당시 정신치료의 문제점은 정신 질환과 사회 및 정치에서 파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별개로 놓았는데, 라이히는 성이 사회를 개조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라이히는 피임 도구와 피임 안내 팸플릿을 나눠주고, 무료 클리닉을 개설하고 성교육을 제공하며, 낙태할 권리를 포함한 여성해방운동 캠페인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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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여성해방은 (가정)폭력과 학대, 강간,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강간 혹은 이를 동반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언론은 해당 지역 강간 통계 자료 등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보도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두고 음란한 서술들을 이어나간다. 이는 비단 1970년대 뿐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피해자의 과거 사생활까지 예사로 들춰내고 있지 않나. 더욱이 개인 방송까지 보편화된 지금에는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특히 가정(데이트) 폭력은 지극히 사적이고 고립된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더 높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피해를 호소해도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나서기를 꺼린다. 피해자들이 가장 크게 공포를 느끼는 까닭은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폭력 이후 진정한 참상은 몸 속에, 그리고 정신에 여전히 남아있는 피해의 흔적이다. 


올리비아 랭은 자유liberty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엇나간 의미들에 대해 해부하면서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는 행동의 대상이 된 몸들에게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지금까지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과 사드 후작을 데려와 엄중히 경고한다. 절대적 자유는 에덴보다 폭력과 학대의 수용소와 더 가깝다고. 성이 상품화된 현재의 세태는, 자연적인 성적 특질이 온화할 것이라고 믿었던 라이히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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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라이히는 정치성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라이히가 개업 초기에 만난 환자들은 정신분석학이 다룰 수 없는 사회적.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약자들이었다. 


1950년대에 시행된 마녀사냥은 실질적으로 역사에 남은 기록보다 훨씬 많다. 동성애란 선천적으로 전복적이며 부도덕하고 개인주의자라는 믿음 아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명분으로 억압 당했다. 동성애혐오증은 각 분야에 침투했고, 그들을 정신질환자 및 범죄자로 몰아갔다. 편견은 오히려 법에 의해 보호되었고 젠더의 전형성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 베이어드 러스틴의 정신과 신념어린 활동이 그가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지 않는 것처럼 정치는 이를 적극적으로 악용하는데(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로써 라이히의 '성은 정치적이다'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흑인해방운동가 맬컴 엑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이자 비폭력 평화주의자 베이어드 러스틴 등 인종주의자들로 인해 몸이 감옥이 된 사람들 통해 우리가 억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한다. 또한 라이히의 저작과 그가 쓴 대부분의 글을 국가적 차원에서 허가해 소각한 점, 페미니즘 행위예술가였던 멘디에타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든 인종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종주의에서 시작된 혐오와 증오 폭력은 몸뚱이를 부풀려 여성, 동성애, 빈민, 난민, 장애까지 이어져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케이트 밀렛, 앤드리아 드워킨, 앤절라 카터, 애그니스 마틴 등은 라이히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혹은 유사점이 있다. 올리비아 랭을 비롯해 그에 의해 발언되고 있는 인물(카터, 드워킨 등)들의 말이 폐부를 찌르듯 콕콕 박힌다. 작가가 서문의 마지막에서 '자유로운 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촉구하는 문장에서 지칭하는 '그'는 비단 빌헬름 라이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이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올리비아 랭은 지난 20세기가 페미니즘에서 게이 해방으로, 민권운동으로, 몸에 기초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를 얻으려는 투쟁이었다고 진단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며, 폭력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 안전하게 일상을 유지하고, 자신의 몸을 방해받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 자유를 얻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나 현 상태가 영구히 보장되지 않는다. 일부분은 이미 사라져 과거로 회기가 진행 중이다.  


애커와 손택의 투병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보편적 의료보험이 시행되지 않는 한 생존은 각 개인의 삶의 의지가 아니라 지불 능력에 달려 있다'라는 말에 공감했다. 오바마가 바꾸어 놓은 의료 시스템을 트럼프가 되돌렸다. 지금 우리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일련의 변화 역시 많은 부분에서 우려가 된다.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전투적으로 살아왔던 한 사람의 사상과 노력이 모두에게 공감받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빌헬름 라이히의 생애 이력 이전에 그가 한평생 추구했던 성이 갖는 정치성과 이를 악용하는 프레임,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 성을 초월한 인류애와 자유를 이해해야할 것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이 책의 인물들을 따라갈 때마다 가슴께를 누르는 듯한 무거움이 없지 않았다. 이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기를 바람하며 '에브리_바디'의 자유를 응원한다.




421.
우리의 과거는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우리 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는 싫건 좋건 간에 대상 세계 속에서 다른 인간 수십억 명과 함께 현실의 자원을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각각의 사적인 몸에 허용된 행동이나 존재 양식에 구체적이고 고통스럽게 제약을 가하는 힘들의 그리드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철 상자는 없다. 도피는 없고숨을 수 있는 장소도 없다. 세계에 복종하거나 세계를 바꿔라. 내게 그 사실을 가르친 것이 라이히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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