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5.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잃고 집단의 언어가 사적인 언어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은 없다.  



이 책은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록과 (미발표를 포함한) 다른 일련의 강연록들, 그리고 글씨기에 대한 에세이를 비롯한 몇 편의 에세이, 그리고 비평서 등이 실려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지구에서 유일하고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며 전종의 생명체 뿐만 아니라 동종인 인류 안에서도 차별과 편견없이 관계 안에 동참하고 연대하기를 거부하며 세상을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파괴했다.


현재,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하고 다각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동시다발적이면서 연쇄적으로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지듯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인이 지구온난화든 아니든 이상 기후와 감당 불가능한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전염병이 발생하고, 심지어 제3차 세계대전을 운운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급자족하는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짚어봐야할 것은 무엇인가를 작가는 얘기한다.


탈중심주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행동반경을 벗어나려는 경향, 고질적인 의식과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집단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 작가는 이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창의적이고 기발함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성향들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상식의 가치를 잊지 말고, 논쟁을 즐기고, 순응과 위선에 맞서 운명의 궤적을 바꾸려는 용기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는 문학이 상호 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데 가장 강력한 장르라고 생각하며, 문학이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얘기한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 관광객은 여행이 이국적이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적이고 긴장감 있는 체험과 현지인과의 접촉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소위 문명의 이기를 포기해야하는 불편함은 감수하고 싶지 않다. 여행은 낯섦의 과정.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익숙하다. 소위 세계화로 인해 각국의 음식과 문화가 보편화되었고, 커피, 의류, 장신구 등 다국적 기업과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도시들은 고유의 개성을 잃은 채 점점 더 유사해지고 있다. 또한 획일적인 기념품, 대형 유원지를 비롯한 관광산업은 여행객이 낯섦의 세계로 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어느 에세이스트가 현대 사회에서 관광객은 많지만, 여행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도덕적 토대로서 평등의 원칙이 동물과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종차별을 부정한다. 고통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특성이기에 적어도 '고통'에 대해서는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 학대는 인간의 편견이나 원시적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오류이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작가는 강조한다.


지구 생명체에서 주류는 인간이고, 인간 내에서도 주류가 존재한다. 종 차원의 주류인 인간의 잔혹함은 인간 세상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전쟁을 비롯한 각종 범죄 현장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도륙하듯 같은 종끼리 무참한 살육을 벌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무작위적 위협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애써 외면한다.  



토카르추크는 우리가 자신의 고유하고 사적인 언어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문학을 제시한다. 창작자의 언어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행위야말로 집단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치료법이라고. 이에 따라 번역가는 창작자의 경험을 통한 문화 창조의 행위와 내밀함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유함으로써 작가와 동등하게 책임을 나눠갖는다고 말하며 번역의 중요성과 번역을 통해 읽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감사하게 여긴다.


독서는, 특히 문학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에 동참하게 해 준다. 저자는 독자가 소설의 허구성을 들어 회의적인 반응을 한다면, 그건 이미 벌어져 존재하는 과거와 확정되지 않는 미래의 존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타자의 삶을 살아보고 공감하는 인식의 확장이 가능하다.  


작가와 작품이 상품으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이제 작가는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책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세상에서 '저자'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만 한다. 이와같은 세태에 유독 문학.예술계에서만 '배고픈 예술가'를 감수하라는 대중의 요구에 대해 올가 토카르추크는, 작가에게 물질적 기반이 제공되지 않으면 문학과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음을 짚으며 쓴소리를 한다. 그는 문학을 단순한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한다. 서술자란 우리 사회 정신의 일부로서 세상을 이야깃거리로 탈바꿈해 누군가의 경험을 다른 사람의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체를 구축하고 통찰하며 이해 가능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파편화된 세상에서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그러면서 제3자의 시선을 잃지 않는 서술자가 필요하다.



창작적 서술자가 설득력을 갖고자 한다면 '다정함'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토카르추에 의하면 작가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도 가르침을 얻는다. 각각의 층위에 있는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작가가 다각적으로 면밀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온당한 세상의 질서를 납득하고 이해하는 자가 작품 속 인물들만은 아닐테니, 저자가 하고자하는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다정함은 인간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적 친밀감과 유대감은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 못지 않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은유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머 감각이 쇠퇴하며, 아이러니에 대한 감수성 상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편협성 등 생각의 범위를 제한하고 독단주의와 근본주의 회귀를 초래하는 직해주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 문학이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넓고 깊은 시야로 바라보지 못하는 직해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협성과 배타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인지하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은유와 비유, 사려와 이해의 관점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한다고, 그는 당부한다.  



세상은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빠르고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한계없는 다채로움과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그동안 겪어왔던 경험을 잘 정리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 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 될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를 비롯해 그가 언급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은 다르지만 대상을 향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냉철하게 혹은 강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정한 서술자'란 그가 말한대로 작가와 서술자가 생명을 부여한 작품 속 인물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포함한 주류중심주의와 집단주의를 거부하고 생명의 본질을 짚어가며 전지구적 생명체를 향한 공감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게 아닐런지. 또한 우리가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여러 부분에서 이입되는 경험들이었다. 스스로를 독서 중독자라고 표현하는 그의 어린 시절 독서 경험(화장실, 밥상머리 할 것 없이 책을 끼고 살았던 것), 어딘가의 책장에서 무심코 빼든 책에서 찾았던 정보를 발견하거나 혹은 희열을 느꼈던 경험, 십 년 주기의 재독 등 너무 흡사한 작가의 독서 경험에 공감되어 즐거웠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한 문헌들 중에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나눌 수 있어 재밌었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우리 세대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지식인의 모습이 이 책 안에 담겨있다. 그의 강의를 들었던 우츠 대학의 학생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궁금해진다. 독서, 문학, 작가, 번역의 역할에 대해 서술한 이 책에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독자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에 매료될 수 밖에 없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