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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 엘리 / 2022년 8월
평점 :
어느 하나 평범한 작품이 없다. 대부분 1960년대부터 1990년 이전에 집필한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기발하기 짝이 없다.
책을 읽다가 작가가 궁금해 도저히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1915년생 여성으로서 그의 삶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본명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 ‘여성 SF작가’ 라는 간판으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기에 필명을 남성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대부분 영국 식민지에서 보냈고 그림 실력이 뛰어났으며, 미술 평론가와 기자로도 활동했던 이력을 보아서 다방면으로 재능과 경험이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불임, 이혼과 재혼, 육군 항공대 입대, CIA 근무, 실험 심리학 박사 학위 취득, 그리고 51세부터 SF소설 작가 입문 등 그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지경이다. 소설들 안에 이러한 삶과 그가 거쳐왔던 생각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책에 실린 열세 편의 중단편 중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눈은 녹고 눈은 사라지고> <엄마가 왔다> <수영장이 비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다.
<눈은 녹고 눈은 사라지고>는 장애를 안고 있는 두 존재가 서로를 보완하며 다수를 상징하는 Y-염색체 남성을 납치한다는 설정과 에티오피아 광야와 숲을 달리는, 한 편의 장쾌한 영화같다. <엄마가 왔다>는 지구에 온 카펠라 행성의 여성들을 통해 지구와는 다른 성 지배 구조를 보여준다. 카펠라 행성을 대표하는 여성들은 지구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는데, 맥스는 카펠라 여성이 남성들을 성노예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살아있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성범죄에 취약한 지구의 여성들은 늘 악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맥스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전해진다. "백인들이 배를 타고 하와이와 타히티에 도착했을 때, 선원들 몫으로 폴리네시아 여자들을 한 무더기 태웠지." 과연 우주선에 올라탄 수십 명의 지구인 남성들은 무슨 일을 당했을까?
<수영장이 비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테요>는 문명을 전파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수순과 아주 닮아 있다. 종교와 교육으로 접근하고 동화의 제스처를 취하며 마치 전적으로 그들을 위한 것인 양 산업화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한다. 문명인이랍시고 온 인간은 고작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 한 명 뿐임에도 불구하고 토착민들은 나름의 저항을 하지만 불가항력이다. 제 맘대로 휘저어 놓은 고돌퍼스 행성을 뒤로 하고 미련없이 떠난 이후 토착민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수십 광년이나 떨어진, 한때 잠시 들렀을 뿐인 소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캐멀링은 '테라식 계몽운동'이라고 말하지만, 그 잣대는 소년의 말처럼 '테라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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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소설은 식민주의와 그로인한 피해의 흔적, 산업화된 국가들이 연합을 맺어 세계 지배를 위한 전쟁에 돌입하는 폭력적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 국제사회에서 약소국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함을 다룬다. 또한 성매매도 모자라 마약까지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세상에 팔 수 없는 건 없듯이 오로지 돈과 이익만을 좇는 이들을 풍자한다.
작가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폐해만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극과 무통의 극단적인 증상에서 오는 고통, 인류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사랑,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소수자이며 동시에 약자인 이들의 연대와 공존 등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놓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감성적으로 접근한다.
<고통에 밝은>에서 주인공이 온갖 잔인한 고통에 대한 실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고 싶은 곳은 고향, 지구다. 이 소설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독을 안고 행성과 행성 사이를 유영한다. 그리고 롤링스톤스의 음악을 들으며 첫 토성탐사대원과 그들의 우주선을 기억하는 <다이아몬드 가득한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우주안전감독관 골렘이 멈춰버린 라그나로크에서 본 토팡가의 실체, 또한 우주를 동경해 왔던 <빔 어스 홈>의 토비가 병실에서 향한 곳은 무엇을 상징할까.
소설 속 그들은 그리움을 안은 채 각각의 '집'으로 상징하는 어느 곳으로의 귀환을 꿈꾼다. 인류는 문명과 기술의 발달로 더 편한 세상에 살면서 인터넷으로 경계없는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는데도, 왜 점점 더 외로워지는 건지... .
헛헛하고, 쓸쓸하고, 달달하고, 다정한, 그러면서 통쾌한 이야기를 기상천외하고 역설적인 SF로 버무려낸 소설들. 어떤 면에서는 스트루가츠키 형제보다 더 엉뚱하다면 짐작이 되려나?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