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120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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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은 의사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 주로 수녀, 신부 등 종교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리스로마 신화, 로마 역사, 성경을 통한 기독교적 가르침 등에서 인용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의사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여성성을 규정지어놓고, 여성의 정절을 강요한다. 이 이야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대목은 비르기니우스가 사건의 시발점이자 가해자인 클라우디우스에게 교수형 판결이 내려지자 그를 불쌍이 여겨 청원을 넣어 그의 감형에 도움을 주었는데, 여기에서 비르기니우스가 인격자로 칭송받는다는 점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딸에게는 명예을 우선하며 자결을 강요했던 자가, 딸의 목숨을 앗아간 죄인을 불쌍히 여겼다는 이유로 그가 훌륭하다는 칭찬에 동의하기 어렵다. 화자는 '죄가 그대를 망쳐 버리기 전에 죄를 버리라'라고 말하는데, 딸의 죽음에 있어서 비르기니우스는 무죄일까? 


[면죄부 판매인의 이야기]의 서문에서 면죄부 판매인은 자신의 일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임무라는 말과 함께 시작한다. 그 내용을 읽다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 써준 부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데, 부자가 되게 해주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질투심도 치료해준다니 그야말로 면죄부는 면죄의 역할만 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면죄부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 아닌 사기에 가까운, 그저 돈벌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판매인은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판매인은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이 직업을 버리고 양심 때문에 전직을 할 생각도 전혀 없다. 이 작품이 종교 개혁 이전에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아마 면죄부에 의한 폐해가 이미 저변에 많이 인식되어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싶다. 사기꾼과 다를바 없는 판매인이 팔고 있는 게 면죄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멜리비 이야기]에서 프루던스는, 복수는 개인에게 속한 일이 아니며 그것은 사법권을 가진 재판관들의 몫이라고 말한다. 재판관들의 소명의식이 절실하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교구 주임 신부의 이야기]에서 죄를 직접적으로 행위하지 않았어도 동의한다는 것은 중죄라고 말한다. 통회란 진실로 슬픔에 가득 차 마음 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현대 사회의 범죄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바라는 것은 진심어린 사과와 뉘우침인데, 이것이 바로 통회일 것이다. '슬픔에 가득 차 마음 아파'함으로써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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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당시의 시대상과 서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백년전쟁, 농민 반란, 흑사병, 교회와 수도원의 타락 등 정치.경제.종교를 비롯한 사회 저변의 문제들과 이에 따른 크고 작은 변화들이 우후죽순으로 발생했다. 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계 각층의 변화를 청자의 입장으로서 이입된다. 


스스로 죽음을 찾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식탐과 도박과 과음에 대한 경고, 낮잡아 취급하는 유대인, 여성에 대한 비하와 경멸, 수도사들의 부정부패, 연금술의 허상과 병폐 등을 풍자적이고 통쾌하게 이야기한다. 


잘난 체하며 자기의 지식을 쏟아내는 수도사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고 슬퍼서 분위기만 가라앉히는 이야기는 그만하라고 퉁을 놓으면서 수도사의 허세를 꼬집는가하면, 진정한 용기와 신중함 없이 미신에 흔들리고 허세에 가득찬 남성들을 향해 호통친다.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는 신부님의 말을 끝까지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이유는 마지막에 있다.  


참회에 대한 연설에서 탐욕, 탐식, 욕정, 교만, 시기, 분노, 거짓, 아부, 경멸, 나태 등이 모두 죄악이자 통회에 대상이며 이에 대한 치유책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 죄악에 대한 치유책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덕목은 겸손과 측은지심이다. 이 두 가지 덕목은 굳이 참회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아다는 데에 있어서 공존해야할 모든 이들이 기억해야하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개인적으로 우선하는 가치ㅡ측은지심ㅡ이기도 하고.


화자들 덕분에 혼자 깔깔거리고 웃다가, 어처구니 없어 혼자 씩씩거렸다가, 다시 키득거렸다가, 깔깔거림 안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 물음표와 이해를 동시에 놓아두면서, 한편으로는 지금 또 다른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생각했다. 누가 21세기 제프리 초서의 역할을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깔깔과 사색의 시간을 보낼 후대를 상상해 본다. 



151.
불화는 다른 사람이 시작하지만 화해는 너 스스로 시작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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