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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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부터 1910년까지, 델 바예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이민자와 칠레 격변의 역사를 배경으로 50여년간의 파란만장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1부는 미국으로 이민 간 파울리나 델 바예와 펠리시아노 로드리게스 데 산타 쿠르스, 엘리사 소머스와 타오 치엔 등 이민 1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2부는 그들의 자식인 세베로와 린 소머스, 그리고 3부에서는 서른 살 아우로라 델 바예의 삶을 서술한다. 소설은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3세대인 아우로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1910년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짚어내려온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샌프란시스코 내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당시 이민자들의 삶과 칠레의 태평양 전쟁, 그리고 내전까지 칠레 역사도 함께 다룬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애국심 하나로 서슴없이 전쟁터로 뛰어들고 진보와 혁명을 위해 총과 펜을 든 젊은이, 낯선 이국땅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민자, 여권 신장을 위해 개척의 길을 걷는 여성 등 강인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한 가문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근현대사의 과도기 당시 여성들의 역사이자, 아우로라라는 한 인물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강안한 여성 세 명이 등장한다. 엘리사 소머스, 파울리나 델 바예, 니베아. 그들은 사랑을 쟁취하고 자기의 삶을 탐험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위기를 극복했고, 그들의 여자 혈육에게 자신들의 성을 물려줬다. 떠난 사랑을 기꺼이 보내줬으며, 그로인한 상실감 역시 다른 방식의 사랑으로 채워갔다. 


니베아는 이미 십대 시절부터 여성참정권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고, 쌍둥이를 임신한 상황에서도 활달한 야당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어나갔다. 아우로라의 가정교사 마틸데 피네다는 하층민 출신으로서 불가지론자이고 사회주의자이며 여성 참정권론자로서 내선 당시 혁명 전단과 책자를 찍어내 집집마다 돌렸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성이 부재한 가정에서 가족들을 보듬고 집안 경제를 이끈 사람은, 삶에 대한 의욕과 강한 의지력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상실감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손과 어깨를 내어 치유를 해준 이들 또한 여성이다. 


소설의 화자라고 할 수 있는 아우로라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를 낳다가 죽은 엄마, 누군지도 모르는 아버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을 파울리나의 손에 맡겨 버린 외할머니, 가장 사랑했던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의 갑작스런 실종,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거의 닫아버렸던 아우로라. 그녀는 유일한 혈육인 파울리나가 죽는다면 표류하는 기분으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남편의 무심함으로 자괴감과 불안증에 시달린다. 파울리나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음에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어린시절 느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터다. 아우로라의 뒤섞인 혈통은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의도된 장치였을까. 이러한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미국 이민 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는 이들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다.  


디에고와의 결혼과 파경으로 단단해진 아우로라는 사랑과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의존적인 사랑보다는 주체적인 삶이 우선해야 하고, 그 바탕이 있어야만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체성이란 혈통의 문제가 아니며, 단단한 인생의 풍요로움은 소소하고 행복한 경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작가는 2부와 3부에 걸쳐 칠레와 페루의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내전까지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전쟁과 정치의 잔혹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자행된 만행과 정치 싸움을, 이성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면서 한편으로는 다정하고 세심했던 세베로가 민간인까지 죽이는 살인기계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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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타오 치엔이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딸에 대한 연민을 가족의 명예보다 더 소중하고 여기고, 사람을 아끼며, '우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따뜻하고 품이 넓은 사람. 두번째 인물은 니베아. 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기 위해 애쓰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능동적이며 유머를 잃지 않는, 그래서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이다. 그리고 프레더릭 윌리엄스. 이 양반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든든하다.   


소설의 마지막, 아우로라는 자신의 운명에는 빛나는 구석이 없으며 모호한 색깔들과 불분명한 미스터리,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다 안다고 자부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그 기억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나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이 모여 '나'의 과거가 만들어지는 건 아닐지, 또한 '나'를 아는 이들의 기억이 왜곡된 점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과거의 절망에,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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