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1천 권의 조선 - 타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조선, 그 너머의 이야기
김인숙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쉽게 만나지 못할 책과 그 책이 품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조선을 다녀간 혹은 조선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한 서구인들이 쓴 우리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 소설 <소현>에서 보였던 김인숙 작가님의 역사에 대한 고찰도 곁들여지는데, 소소하나마 이 부분의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은 개항기의 책들만이 아니라 하멜 이전의 유의미한 기록들, 그리고 기록의 길이 탓과 그외의 이런저런 이유로 어쩌면 영원히 번역본으로는 출간되지 못할 내용들에 대해서도 담겨있어 역사와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소중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사실 언급된 문헌의 내용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슬슬 빈정이 상하기 시작한다. 넘쳐나는 오류, 조선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시선, 약소국의 비애가 전해진다(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한국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 일례로 마테오 리치의 기록에는 임진왜란이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승자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만봐도 당시 조선이 갖는 존재감을 짐작할만하다. 다른 하나를 더 보자면 맥레오드의 <조선과 사라진 열 지파>에서는 조선인이 유대민족의 후손이라고,  미케위치의 <한국인은 백인이다>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라고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한다. 일본의 일본의 천황이 이스라엘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고 하는데,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은 끝이 없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오래된 문헌들의 번역과 원전의 충실도가 중요한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그리고 객관성에 따라 전달하는 바의 온도는 달라진다. 스웨덴 기자 아손과 차벨의 서술 방향이 전혀 달랐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다. 보이는 것 이상의 이면을 보지 못할 깜냥이라면 적어도 비틀린 선입견과 왜곡된 시선을 불러일으킬만한 주관적 판단은 지양해야함을 다시 새긴다. 개인적으로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는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사실 하멜이 표류기를 쓴 이유는 억류 기간 동안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한 보고서에 불과했는데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조난 모험 소설처럼 팔렸다. 정작 하멜은 조선을 야만의 나라라고 한 적이 없건만, 유럽 독자의 입맛에 맞추려다보니 하멜의 모험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조선을 부정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처럼 상술에 의해 왜곡된 경우가 있는가하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뒤크로와 로티의 기행문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른 차이가 얼마나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사실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삐뚤어진 고정관념에 의한 시선은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아손과 차벨의 서술 방향이 전혀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ㅡ 


이 책은 우리나라를 다녀간 기록문과 항해기 뿐만 아니라 백과사전, 잡지, 지도, 화집 등 다양한 문헌들을 다루고 있다.  


미국성서공회의 <선교 안내 목록> 에 들어있는 지도 중 하나가 호텔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는데, 지도의 상단에는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는 경성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약도에 가까운 지도 한 장만으로도 당시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어 씁쓸했다. 라페루즈의 <항해기> 부분을 읽을 때 제임스 쿡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 대목에서 문득 어린 시절 제임스 쿡의 전기를 읽으며 그가 하와이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비난했던 내가 떠올랐다. 고작 열 살 무렵에 이방인에 대한 나의 시각이 18, 19세기 유럽에서 조선을 바라본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객관성을 잃은 채 비판없는 책읽기가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새삼 느낀다. 


흥미뤄웠던 장은 올링거의 <코리언 리포지터리> 와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 코리언 리포지터리는 1892년, 서울에서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다. 학술기사부터 기행문, 에서이, 최신 뉴스, 광고 등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는, 한마디로 종합잡지였는데, 이 잡지가 발행된 1892년에 우리나라에는 신문을 비롯해 언론이라 불릴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이 잡지는 실제로 발행 당시 우리나라 근대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사실.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쥐 베르의 <조선 원정기>,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탐험기> 를 보면 침공과 약탈의 순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쥐베르의 기록이 1873년에 발표될 때 외규장각을 비롯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는 이미 파리 국립도서관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후 의궤는 파리 국립 도서관의 폐지 창고에 중국 관련 문서로 분류된 채 버려져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2011년, 145년이 걸려서야 완전한 반환이 이루어졌다. 작가의 말처럼 예술인이든 종교인이든 침략하는 순간에는 침략일 뿐이고 도적질을 할 때에는 도적일 뿐이다.   


작가는 우리나라를 소개한 서양 외서를 이야기할 때, 그 시작은 쿠랑이라고 말한다. 쿠랑의 <한국서지>는 조선의 책에 관한 책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 책의 역사, 책의 언어, 책의 숨결이다. 책의 이야기를 담은 책, 그야말로 책과 조선이다. 쿠랑이 서지로 작성한 조선 책이 3,821종에 이른다는데, 그는 조선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고. 모리스 쿠랑이 조선에 온 것은 개항 초기 1890년이었다. 파리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후 베이징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조선 공사관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쿠랑의 상사이자 프랑스 초대 공사관이었던 플랑시는 우리의 금속 활자본 직지를 프랑스로 가져간 사람이다. 인간의 관계는 몇 다리 건너 모두 얽혀있다는 말을, 이 책을 읽으면서 곱씹게 된다. 


작가가 '나가는 말'에서 쓴 <함녕전 시첩>을 읽자니 참담하기 그지없다(이완용의 마지막 문구는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내가 이러한데, 이 참담한 시를 비로 만들어 침전 후원에 세웠다니 고종은 다리 뻗고 잠들 수 있었겠는가.  


​ㅡ 


이 책에 등장하는 문헌들이 모두 조선을 중심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 아주 적은 분량을 차지하고나 스치듯 지나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기록들이 중요한 이유는 각 시기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룬 마흔다섯 권의 책들이 현재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시 관람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보니 책에 실린 풍성한 사진 자료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또한 문헌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각 책들의 저자에 대한 에피소드와 사연, 그리고 이면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독서보다 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만족스러울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