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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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겼던 '폴' 작전이 실패하자 프리덤 타워에 있던 모든 이들은 절망하고 포기한 채 마약에 빠져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시종일관 언쟁과 다툼의 연속이다. 102개 부족의 총회를 열어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하겠다고 모인 자리에서 인간들은 해법을 찾기보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느라 바쁘다.  


쥐는 쥐대로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티무르와 알 카포네 사이에 끊어질듯 팽팽한 긴장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 승리 후 누가 통치자가 될 것이냐를 두고 두 우두머리는 충돌하고 티무르는 알 카포네를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즉위한다. 절대 권력자가 된 티무르의 행보는 과거 인류사에서 독재자의 행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제 일신만을 챙기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까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움켜쥔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바스테트의 성장담이자 동시에 제3자의 입장에서 인간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스테트가 바라본 인간은 문제 해결을 우선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고, 늘 사랑을 떠들지만 정작 서로 사랑하지 않기에 조화와 합의가 아닌 '다름'과 '차이'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에스메랄다와 바스테트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면 우리 내면의 질투와 욕망은 유한한 삶에서 소유가 갖는 한계와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작가는 바스테트의 입을 빌어 현재 인류와 지구에 닥친 여러 문제들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짚고 있다. 환경 오염, 동물 학대, 전염병 확산, 지구의 사막화, 식량 위기 등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인지되어 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 공장에서 뉴욕 공동체가 머무는 숙소를 묘사한 장면은 흡사 난민촌을 연상시킨다(물론 소설에서는 환경 자체를 열악하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너도나도 탈핵을 외치고 있지만 결국 힘있는 자들은 여전히 '사용 가능'한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국제 사회를 빗대고 있다. 또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어진 작은 사건이 순식간에 집단 학살로 변모하는 모습은 폭력에 기대고 있는 인간의 광기를 나타낸다(그 장소가 소통의 장소여야 할 회의장이라는 사실이 더 의미심장하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사건의 발단이 된 사고가 무효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토록 엄청난 수의 죽음이 갖는 명분은 무엇이 되겠는가 말이다.  


티무르는 지구가 쥐의 제국으로 완성되는 순간 인간을 '소수 종'의 자격으로 격하시키겠다고 말하고,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월의 허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소설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학대, 강요와 억압, 폭력과 살의라는 악행에 있어 쥐와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티무르가 인간을 살려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나열하는 부분에서 딱히 항의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현재 인류가 만들어낸 세상으로 지구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바스테트는 인간에게도 존경할만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지에 대한 각성과 그에 따른 보완, 그리고 문자와 기록이다. 티무르는 자신이 할 수 없는 문자의 기록을 바스테트가 후대에 남겨주기를 바라고, 바스테트 역시 자신의 서사를 문자로 남기길 희망하는데, 이는 인류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문자와 기록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바스테트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제시한 대안은 '소통'이다. 나 역시 살아보니 문제 해결에 있어 소통과 설득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바스테트가 총회 의장 선거에 나서서 내놓은 제안은, 초기에는 인간이 총회의 다수를 차지하겠지만 차츰 특정 종의 배제없이 여러 종의 비주류 집단의 대표를 받아들여 구성에 변화를 주겠으며, 학대에 가까운 종 차별을 지양하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전쟁 없이 소통으로써 평화를 지키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랜트가 선출됐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소통과 설득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티무르가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은 증오이고, 바스테트는 용서다. 작가는 인류가 더 늦기 전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서와 화합으로서 지구 생명체와 공존하기를 바란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일에 무관심해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둘뿐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나탈리의 말이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한 말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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