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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의 중단편 네 작품이 실려있다. 고딕소설을 표방하는 이 소설들은 추리 소설의 요소까지 가미하고 있어 적은 분량임에도 읽는 맛이 있다.

[편지]는 사랑을 하는 동안 다변하는 사람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다. 상대의 교묘하고 악랄한 계략에 대한 분노와 혐오, 진실을 폭로하는 순간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주는 두려움 등 양가적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심리 또한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리지는 앤도라를 향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혼잣말을 하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는 정작 리지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선택은 결국 본인의 몫이고, 이 선택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닌 어느쪽이 덜 불행할지 여부가 될 것 같아 안쓰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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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지른 문]의 그래니스는 고된 노동과 궁핍 뿐인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 빚만 남기고 죽은 아버지로 인해 마지못해 얻은 일이 죽도록 싫었고, 늘 가난했고, 건강도 나빠졌다. 그는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싶었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아지지 않았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유산으로 부유해졌으나 진정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식지 않는 무대에 대한 열정으로 희곡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 열정은 세월이 지날수록 병적인 집착으로 변해갔고, 그럴수록 지독한 절망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는 사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아니라 절망에 지쳐 삶을 끝내고 싶지만, 자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려고 한다. 무엇보다 실패로 점철된 인생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라고는 살인 뿐인데, 아무도 자신의 성공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살인 이외에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남자. 읽는 내내 그래니스를 비겁하고 이기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다.
생기 없는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는 공포는 모든 사람이 안고 있는 갈등이다. 열정 없는 지루한 삶을 바라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니스가 수많은 요소로 엮어지는 긴 인생에 오로지 열정과 성공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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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에 등장하는 애슈비 부부. 길다면 긴 세월을 함께 살아야 할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사랑보다는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과 신뢰가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숨기고 거짓을 둘러댄들 그 행복이 지속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세상에는 비겁한 사람이, 비겁한 사랑이 참 많다.
실린 네 작품 중에서 고딕소설의 공포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하녀의 종]. 1년의 대부분을 부재 중이고 가부장적인 것도 모자라 의처증까지 있는 남편에 의해 시골에서 고립되다시피 살고 있는 여성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물리적 폭행만 휘두르지 않을 뿐 다른 형태의 가정 폭력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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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의 종> 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들은 고딕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네 작품을 통해 독자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공포'냐는 점이다. 작품들에서 정작 '유령' 혹은 무형의 존재는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 여성을 제 맘대로 통제하고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인권 유린, 상대의 애정과 진심을 농락하는 거짓과 사기, 신뢰와 존중의 부재.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공포를 느껴야하는지, 이디스 워튼은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