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지도 -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도시들에서 배우다
에릭 와이너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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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재밌다(읽다가 커피를 뿜을 뻔 했는데, 그걸 참다가 사레들렸다). 저자의 전작인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사놓고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입소문이 그냥 난 건 아닌 듯 하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창조적 천재에 대해 인공지능 전문가 마거릿 보든의 정의, '참신하고 경이롭고 유용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에 타당성을 둔다(이는 미국 특허청에서 쓰는 기준이라고도 한다). 문명의 흥망성쇠가 유전자 풀의 변동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당연하지!) 저자는 인류의 도약에 영향을 미친 천재들이 존재한 전 세계 황금기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이 도약의 원인을 탐사한다. 사전 정보나 소개도 없이 돈키호테식 세계 여행인 셈이다.  









그가 방문한 도시는 아테네, 항저우, 피렌체, 에든버러, 콜카타, 빈, 실리콘밸리 등 7곳이다. 열거한 도시들만의 특징도 있지만 공통점도 있고, 도약의 시기에 묘하게 반대의 현상이 있기도 하다. 결국 유사한 사건에도 도시의 환경이나 사람, 정서 및 관습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인들의 자연과 걷기의 힘, 시민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예술을 향한 사랑, 개인의 영광보다 중시한 아테네 자체의 영광, 변화에도 위축되지 않는 자세와 개방성. 송왕조 시대 항저우의 읽기, 쓰기, 관찰. 피렌체의 부와 자유, 그리고 불확실성. 에든버러의 결핍과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실용성. 콜카타의 다양한 문화 흐름, 단순함과 모호함의 공존, 비선형적 대화인 '아다'(아테네로 치자면 아고라 같은). 빈의 천재들 끼리의 경쟁과 마케팅, 실패의 극복과 문화. 실리콘밸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실리콘밸리화.   



저자가 여행한 도시를 관통하는 공통적 특징은 타이밍과 적당한(어렵다) 결핍, 걷기(움직임), 무질서, 개방성, 그리고 꾸준한 관찰이다. 기술이 발달해 가상의 세계에서 세계인들이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장소는 중요하다. 저자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가 커졌다고 얘기한다. 세계의 젊은 대학 졸업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은 가상 공간이 아니라 실물의 실리콘밸리인 것처럼.    



인류학자이자 실리콘밸리 토박이 척 대러가 실리콘밸리에 대해 하는 말을 읽고 있자니, 실리콘밸리의 특성이야말로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평균적인 실리콘밸리 사람은 많은 사람을 알지만 깊게 알지는 못하고, 자신을 빠르게 관계망에 넣을 수도 있고, 빼낼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는 애착이 결여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SNS 상에서 보이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그런데 이러한 특성이 천재의 장소라는 아이러니). 실리콘밸리가 창조작 장소가 된 요인은, 약한 유대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과 배제를 당함음로써 얻어지는 창의력. 이또한 페이스북에서 볼 수 있는 약한 유대와 상통한다. 실리콘밸리는 기술이라는 신조에 충성한다. 실리콘밸리가 에든버러와 가장 비슷한 것은 미국의 이주민 1세대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개선의 욕구 역시 마찬가지다.  



로저 맥너미에게 당신은 똑똑한 것이냐, 운이 좋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는 그의 대답에서 그야말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타이밍에 대해 가장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도시들은 왜 창조적 황금기를 이어가지 못했을까? 문화의요소가 고갈되면 도시는 힘을 잃는다. 시험으로 점철된 강요된 교육 제도, 철학(종교)과 문화의 상실, 과거의 예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현실(현재 피렌체의 젊은이들이 미켈란젤로가 싫다고 말할만큼 말이다). 위대한 문명은 제각각의 이유로 위대해졌지만 무너지는 이유는 하나다. 오만 때문이라고.



저자가 이 실험을 벌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아홉 살 짜리 딸을 위해서였다는데, 창조는 유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가족은 주조할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 가정에서 만들어내는 문화는 창의성을 북돋을 수도, 억누를 수도 있다. 저자가 세계 일곱 곳을 여행하며 밀하고 싶었던 바는,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창조적 천재는 가장 작은 집단인 가정에서 발현되는 창의성에서 시작한다는 것일테다. 결국 에릭 와이너는 이 모든 것이 "당신들 손에 달렸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책을 통해 뭔가 깨달음이나 통찰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가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있어 그 과정에 어느 부분은 생각이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크게 불편하지 않고, 깔깔 웃어가며, 진지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저자가 피렌체에서 만난 유진 마르티네스는 "즐거움을 즐기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즐겼다.  





사족.
1. 빌 브라이슨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니!


2. 헌신적인 부모에게 사랑으로 보호받은 사람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어 비달 말씀)는데, 음... 그렇다면 정서적 결핍이 일반적인 양육 환경보다는 더 클텐데, 이것도 모순이네. 부모나 삶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유년시절의 부모와의 애착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봤을 때 어느 것이 더 좋다 말하기 어렵다. 저자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소개한 투렛 증후군을 앓는 재즈 드러머 이야기는 나도 생각이 나는데, 이 사례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하긴, 삶에 정답이 있으랴만은.


3. 영국인(의 식민주의)이 아니면 인도 과학자 자가디시 보스의 발견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 물론 인도 문화의 특성을 버리고 영국에서 태어났거나 유학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맞든 맞지 않든 이러한 가정이 씁쓸하다. 


4. 빈에서는 몇 년씩 알고 지낸 사이라도 서로의 직업을 모를 수 있다. 직업을 아는 건 아주 친한 친구 사이 뿐이라고. 만나면 그런 이야기 조차를 아예 하지 않으니까. 휴일에 어디를 갔는지, 무슨 영화를 봤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강의를 들었는지, 새로 찾아낸 식당이 있는지 등 같은 대화를 나눈다고. 만난 후 나이나 직업, 출신학교, 전공 등 아주 사적인 질문을 하는우는 우리와는 참 다르다. 생각해 보면 무례할 수 있는, 그리고 관계를 맺는 데 아무 상관이 없는 질문을 우리는 참 쉽게 꺼낸다. 아마도 그 사람의 배경이 그 사람과 동일하다는, 사회적 계급 의식에 길들여져서인지도 모르겠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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