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으로 빚은 집 - 1969 퓰리처상 수상작
N. 스콧 모머데이 지음, 이윤정 옮김 / 혜움이음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이 익숙하지 않다. 그동안 이와 관련해 읽었던 책을 떠올려 보면 곧바로 생각나는 책은 <모히칸족의 최후> <내 영혼이 따뜻해던 날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정도다. 그나마도 원주민이 직접 쓴 작품은 체로키 혈통을 이어받은 포리스트 카터의 작품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시애틀 추장의 책은 문학이라고 볼 수 없는 듯 하고).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도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와 이후 위의 책들을 읽을 때 찾아본 상식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데 나바호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 카이오와족 출신 작가가 쓴 이 책을 손에 쥐고 오랜만에 만나는 북미 원주민 문학과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고향 땅 왈라토와 협곡으로 돌아온 나바호족 청년 아벨과 그의 할아버지 프란치스코의 과거를 통해 원주민의 아름다웠던 땅, 하늘, 사람들과 백인들로 인해 비참하게 내몰린 그들의 이야기다.  
 


콜럼버스에 의해 졸지에 인도 사람이 되어버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쫓겨났고, 야만인으로 낙인 찍혀 강제로 개종당했다. 각 부족의 전통과 문화와 관습은 무시된 채 수용소 생활과 기나긴 이주를 반복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 노무로 푼돈을 벌며 남는 시간에는 술집에서 빈둥대는 것 뿐이다. 문명인이 그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시간을 죽이는 일. '보호'라는 명분으로 인디언 자치 지구를 만들어 지배자 편의에 맞춰 부족 간의 관계 혹은 관습에 상관없이 재배치하고,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경고와 감시를 해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은 서정적으로 표현한 원주민들의 대지와 자연, 그리고 영혼이다. 과하지 않은 간결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자연의 모습은 종종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처절한 원주민 서사를 몇 안되는 등장 인물을 통해 사실적이면서 아프게 그려냈다. 아벨은 환각에 빠져 백인 남자를 위협적인 뱀으로 착각해 살해했는데, 이는 원주민을 위협하는 침략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아벨이 재판 당시 묵비권을 행사한 까닭은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을 통해 자신(원주민)의 상황을 백인들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얀 악마들. 원주민이 바라본 문명인의 모습일 터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예전의 문화와 전통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던 중, 술과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환각 상태에서 백인을 살해해 7년을 복역하고 인디언 재배치 기관에 의해 LA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지만 급속하게 변화된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벨에게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아벨의 할아버지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할아버지를 자신이 땅에 묻지 않고 교구 신부에게 부탁한 후  '여명으로 빚은 집'으로 달려가는 아벨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프란치스코와 아벨이 추억하는 세상과 현실의 괴리는 극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영혼을 놓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스스로에게 변해야 한다, 변해야만 한다고 읊조리는 그들의 이 자조가 낯설지 않다. 변해야만 한다는 강박, 변하지 않으면 도태할 것이라는 불안감.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 협찬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