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현재 뿐.

소설을 읽는 동안 늪지대의 습한 기운도 모자라 눈과 비가 번갈아 내리며 안개까지 드리운 장엄호텔은 그야말로 물속에 가라앉은 듯한 습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제목과는 거리가 먼 장엄호텔(원제 : Splendid Hotel)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낡고 노후됐다. 배관은 수시로 말썽이니 누수는 말할 것도 없고, 습한 지역 환경과 마감처리 부실로 주요 건축 자재인 목재는 구멍이 숭숭 뜷려있으며, 지붕 역시 비가 샐 것을 우려할 정도로 부실하다. 할머니가 미래 시장성을 내다보고 세웠던, 늪지대의 아름다운 풍경 속 하나였던 그 장엄호텔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엄마와 함께 떠났던 두 언니, 아다와 아델은 병약해지고 실패해서 장엄호텔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엄마의 죽음과 자신들의 병약함과 실패를 두고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원망과 비난과 힐난을 번갈아가며 쏟아낸다. 이 두 사람에게 공공의 적은 자신들을 살뜰히 보살피지 않는다고 여기는 동생인 '나'다.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엄마는 막내만을 남겨둔 채 두 언니를 데리고 떠났고, 살기가 막막해지자 돌아온 두 사람을 먹여살릴 뿐만 아니라 아다의 약값을 대고 그녀의 병수발을 든다. '나'가 혼자 동동거리는 동안 아델은 호텔의 남자 손님들과 노닥거릴 뿐이다. 힘들고 고단한 노동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얼핏 보기에는 더없이 밉상으로 보이는 아다와 아델의 삶도 순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나'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아다는 늘 어딘가 아팠다. 그래서 습한 환경에 취약하고 어디든 원하는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다.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고작해야 할머니가 묻혀있는 공동묘지 정도다. 배우지망생인 아델은 한 번도 이름이 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루지 못한 꿈에 미련이 남아 호텔에 돌아온 뒤에는 손님들에게 허영을 부린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없는 호텔을 견디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마음 속 어딘가에 분노가 켜켜이 쌓여있는 두 사람은 대상을 막론하고 그 분풀이를 쏟아내기 일쑤다. 아델은 어머니가 아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장엄을 떠났다고 말하고, 아다는 아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떠났다고 말한다. 이쩌면 이들이 상대를 계속 헐뜯는 이유는, 인생을 실패한 탓이 누구도 아닌 자신때문임을 알기에 누군가를 빌어 자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가 있다.
'나'는 아다의 병수발과 두 언니의 횡포를 군말없이 받아들이는데 두 사람에게 딱히 애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사람보다 장엄호텔을 우선한다. 전염병이 발생해 사람들이 병들어 악화되는 것보다 호텔이 악화되는 것이 더 걱정이다. 호텔의 불편 사항을 최소화하고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서이며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나'의 호텔에 대한 지극 정성은 마치 할머니를 부양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나'에게 있어 장엄은 가족이자 집이요 삶 그 자체다. 그에게는 오직 장엄호텔 뿐이다.
어느날, 아델이 연극배우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무렵 한 극단주로부터 배역에 대한 최초의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배역을 아델은 이 배역을 거절한다. 그녀의 오랜 염원이었는데, 왜일까?어쩌면 실패와 낙오에 익숙해진 아델에게 새로운 희망은 오히려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꿈이 좌절된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이 가족에게는 장엄호텔(할머니)가 다른 형태의 늪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전염병의 원인이라고 판단하는 쥐가 호텔 근처를 맴돌자 쥐덫을 놓지만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덫을 피해다니는 쥐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나'의 자조에서 쥐는 두 언니를 비롯한 호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자신이 가진 모순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 자매는 각자의 방식과 나름의 이유로 장엄호텔을 지키고, 호텔과 함께 노화한다.
장엄호텔에 머물렀거나 거쳐갔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대들보가 무너지고, 할머니의 무덤이 두 동강 나고, 늪이 가족을 빨아들이고, 늪으로 인해 호텔이 고립되었어도, '나'는 장엄호텔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장엄은 끝까지 버틸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끝없이 고단하기만 한 이 삶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문득 지금 우리의 모습과 겹쳐졌다. 2년이 되어가도록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전염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며 견디고 있는가. '나'가 장엄호텔을 돌보듯, 고립된 호텔에서 단 한 명의 투숙객을 위해 호텔의 문을 열어 두었듯, 우리들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보수하며 살아갈 것이다. 무사히 잘 버티어 보자.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