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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벽
세라 모스 지음, 이지예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7월
평점 :
누가 유령인 거지? 우리인가, 아니면 죽은 그들인가.
열일곱 살 실비 가족과 대학 교수 슬레이드, 그의 제자 피터, 댄, 몰리는 철기시대를 재현하는 캠프에 참가한다.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달갑지 않은 이 캠프에서 실비와 실비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아버지 빌은 이곳에서 그토록 집착하는 고대 철기시대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하기를 바라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 의식이 강하며 아내와 딸에게 무자비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실비의 아버지는 고고학과 혈통에 집착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족에게 주입하고 억압하고 순종을 강요한다. 실비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먼 지역의 박물관 관람을 위해 학교를 결석시키고, 고된 고대 역사 탐방에 데리고 다닌다. 고등학생인 실비는 대학 진학보다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실비와 그녀의 어머니의 반응이 눈에 들어온다. 남편의 폭력에 순응하고 간혹 실비가 저항하는 낌새가 보이면 아버지를 거스르지 말라며 딸을 탓한다. 불공평하다는 실비의 말에 인생이 다 그렇다고 대꾸하는 엄마의 체념어린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도, 딸도 보호할 의지가 전혀 없다. 엄마 앨리슨은 직접 딸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았을 뿐 딸을 향한 남편의 폭력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실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평소에도 비정상적일만큼 고대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못한 이유는 잔인할 정도로 끔찍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일 터다. 건장한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에 여성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가정이라는 특성상 쉽게 드러낼 수 없음을 감안하면 두 모녀의 모습이 전혀 뜻밖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두 모녀에게 보여지는 폭력의 내면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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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의 엄마는 답사를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남편이 가족들을 부양하느라고 원하는대로 살지 못한다면서 딱하게 여긴다. 이게 딱하게 여길 일인가? 그리고 실비는 아버지가 화를 폭발하는 원인이 자신의 잘못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맞을만 하기 때문에 맞았다는 것이고, 이것을 가정폭력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이라고 인식한다. 이 안타까움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극대화된다.
실비의 아버지는 습지에서 결박당한 모습으로 발견된 십대 소녀 미라를 보면서 마치 학자처럼 객관적으로 미라를 분석한다. 그러나 집단 폭행 후 살해당한 수백 년 전 미라의 모습에서 자신이 딸을 폭행하는 것을 결부시키지 못한다. 실비의 아버지 빌이 실비를 사랑하지 않아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게 옳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러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남성들ㅡ슬레이드 교수, 피터, 댄ㅡ은 어떠한가.
이들은 방관자 혹은 방조자다. 실비의 엄마 앨리슨이 피터의 튜닉을 빨아주겠다고 하자 몰리가 나서서 피터가 직접 빨라고 말하는데, 엉뚱하게도 피터의 튜닉을 아내에게 빨라고 지시하는 빌. 그런데 피터는 정작 자신의 옷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관할 뿐이다. 그리고 실비를 제물로 가정한 철기시대 의식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댄은 실비에게 괜찮냐고 묻지만 잔인한 이 재현을 거부하거나 제지하는 남성은 없고, 슬레이드 교수와 빌은 주도적으로 이 재연극을 밀고나간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소설의 주요 인물 중 캠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빨간불을 켜는 유일한 인물은 몰리다. 여성이 용변보는 어려움이 신체적인 구조, 즉 생물적 측면이 아닌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이 문제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사냥을 하지 않는 캠프에서 남성들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여성인 실비와 실비의 엄마만 노동에 시달린다고 지적한다. 부족의 여성들은 부족원을 위해 노동하고 남성들은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들의 일이 더 위대하다는 듯이. 이는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업주부를 폄하하는 현 세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속 몰리는 늘 여유롭다. 까칠한 실비의 말투에도 화를 내지 않고, 실수를 곧바로 인정하며 잘못을 사과한다. 반면 실비는 자신이 늘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점검을 하고, 상대가 나를 비웃는 건 아닌지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 모습은 아버지 빌과 비슷하다. 왜일까?
그 어떤 고고학자보다 해박하다고 자신하는 실비의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크다. 사회 조직 안에서 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감과 과시욕을 가족을 통해서 잔인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캠프 기간동안 빌이 슬레이드 교수와 남학생들을 대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렇듯 그릇된 방식으로 욕구를 채우는 아버지와 체념이 익숙한 어머니의 양육환경이 실비에게 그대로 학습되어졌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실비를 구조한 사람들은 가정 밖의 여성들이다.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작가는 소설 마지막에서 여성 연대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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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고고학은 죽은 사람들이 산사람에게 말하려는 것을 실행하고 노력하는 것(p47)'이라는 문장이 쓰여있다. 두 손이 결박된 채 습지에서 발견된 2천년 전의 미라 소녀가 현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고대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유령 취급을 당하는 여성들이 부딪쳐 넘어야하는 사회의 벽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