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17.
이 편지는 단 한 번만 읽도록, 다 읽으면 없어져 버리도록 만들어졌다.  



에이전시의 네드와 가든의 블루는 각각의 진영에서 최고 요원으로 꼽힌다. 둘은 적대적 관계로서 시간의 가닥을 오르내리며 서로의 흔적을 파괴하고 시간선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는 시간여행자들이다.  







 


일단 이 책은 차 한 잔 놓고 고즈넉하게 읽기를 추천한다. SF소설로 인지하고 책을 펼쳤는데 셰익스피어, 밥 딜런, 성서, 디킨스 등의 문구들을 인용하며 그림처럼 묘사한 이 아름다운 문장들은...! 요즘에 밤에 책을 잘 읽지 못하고 이른 아침에 읽는 편인데, 읽으면서 밤에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 소설은 대단한(?) 스토리가 있지 않다. 어느날 레드와 블루가 장난처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점점 닮아가고 결국 두 존재는 진심어린 감정을 공유하며 적이 아닌 동지가 된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블루와 레드, 그리고 그들의 편지를 통해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것과 결핍된 것들을 짚어보게 된다.  
 


133.
난 네 안의 내가 나의 어딜 닮았는지 궁금해. 




 
먼저 두 조직을 이루는 근간이 눈에 들어온다. 생태학적인 조직 가든과 기계적인 조직 에이전시. 에이전시가 시간의 실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것에 중심을 둔다면, 가든은 그 실가닥을 심고 다듬어서 시간 타래로 묶는 데에 무게를 둔다. 실의 위 쪽이 안정된 과거, 실의 아래쪽은 살벌한 미래다. 에이전시는 까마득히 먼 아래쪽을 차지해 가닥 위쪽으로 요원들을 파견하고, 가든은 이를 저지하기에 바쁘다.  
 


시간 전쟁을 소재로 한 만큼 두 주인공이 개입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상상도 흥미롭다. 카이사르 암살 현장, 몽골 칭기즈칸의 기마 부대, 소크라테스와 이백, 페루의 고대 제국인 타완틴수유, 진시황제, 한고조, 아편전쟁, 쥐라기 시대, 2차 세계대전의 러시아 전선 등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 시간 가닥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레드와 블루. 읽으면서 한번쯤 경험해 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았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타완틴수유와 중국이 은을 교류했다면 서양이 중국 왕조에 뒤쳐지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인데, 과연 서구 중심의 역사가 다르게 바뀌었을 알 수 없지만 있다는 상상이 나쁘지 않더라는. 역사의 가정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만, 그 가정이 긍정의 상상이 되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종종 한다.
 


두 인물이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는 상당한 위험을 수반한다. 조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배신자로 낙힌 찍혀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진 속의 단서들을 통해 서로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공허함과 외로움을 위로한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온 위기. 레드가 살기 위해서는 블루를 공격해야 하고, 블루가 레드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몰린다. 각자의 임무에만 충실할 뿐이었으나 현재 서로가 전부인 두 존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레드는 말한다. 승리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무한경쟁 시대에 우리가 그 경쟁의 톱니바퀴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와, 누군가를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세상은 좀 달라지려나. 레드와 블루는 이러한 메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한다. 

 
우리는 이렇게 이길거야. 
(마지막 문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 가든의 요원은 숨을 거두면 포자를 통해 퍼져나가고, 바람에 날리는 홀씨로 씨앗을 뿌리고, 깊숙이 내린 뿌리에서 새순을 돋운다. 문득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계적인 에이전시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 연쇄를 중단시키고자 한다는 설정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는 인간의 미래를 암시한다. 
 


블루가 느끼는 허기, 타인과 상관없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싶은 욕망, 순수하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아로 여기는 '나다움'에 대한 갈망. 이는 조직 사회에 발맞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느끼는 허기요 갈망일 것이다.  
 


단 하나의 '우리'가 된 블루와 레드. 그들이 식물과 기계를 대표한다는 것,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대적인 관계에서 연대의 관계로 전환하며 끈끈한 동지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이다. 
 


"블루, 난 너를 사랑해."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진솔하게 와닿는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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