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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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에이든의 결혼식 날, 호텔 앞에서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조니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진 펠리시아.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고, 영국에 일자리를 얻은 조니는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펠리시아. 가부장적이고 애국심을 중요시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으로서 영국군에 입대한 조니를 용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펠리시아를 창녀라고 몰아붙인다. 결국 조니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한 펠리시아의 고단한 여정이 시작된다. 





 



주인공 펠리시아의 나라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이후 여섯 개 카운티가 영국의 일부로 남아 북아일랜드가 되었고, 그에 따라 영국에 대한 감정이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와중에 경제 불황에 의해 공장들이 문을 닫고 대규모 실업 사태와 고용 불안정으로 인해 영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때 실업자가 된 펠리시아는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증조 할머니를 돌보고 살림을 도맡으면서 가정에 얽매이게 된다. 카톨릭 국가이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한 펠리시아가 비난을 감수하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연인을 기다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로지 조니가 근무한다는 상점 이름 하나만 들고 도착한 낯선 나라 영국에서 펠리시아의 순진함과 고지식함은 위태롭기만 하다. 사람들은 이방인, 그것도 차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일랜드인을 향한 무시를 쏟아낸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주로 하룻밤 상대로 유혹하는 길거리 남자들, 혹은 집단 생활을 하는 종교단체 무리다. 낯선 거리에 선 펠리시아는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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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녀를 버스터미널에서부터 눈여겨 본 남자, 힐디치.  
힐디치는 누가 봐도 친절하고 배려가 넘치며, 회사에서는 유쾌하고 상냥한 직장 동료다. 겉으로 봐서 그의 이면에 불안증과 연쇄살인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연인을 찾아 집을 나왔지만 그 남자의 행방을 찾지 못할테고, 임신까지 한 사실을 관찰만으로 파악한 힐디치가 펠리시아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상당히 용의주도하고 면밀하다. 논리적으로 거짓말을 일삼고, 상황을 조작하고, 임신한 어린 소녀의 동정심을 부추기며, 돈이 없으면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그녀의 돈을 훔치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의도한대로 이끌어 간다. 
 


독자는 힐디치의 흑심을 진즉에 알아챘기에 그에게 끌려다니며 거부하지 못하는 펠리시아를 답답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녀는 낯선 타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푸는 힐디치를 외면할 수 없다. 가족도 자신에게 신경써주지 않고, 아버지는 창녀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그녀가 어릴 때 죽은 어머니조차 꿈에 나타나 더럽다는 욕설을 내뱉지 않는가. 지속적으로 낙태를 유도하는 힐디치의 권유를 거절하는 펠리시아는 낙태를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을 가지며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힐디치는 양의 탈을 쓴 악마일까? 힐디치는 펠리시아 이전에 만났던 여성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읊조리며 추억한다. 빚을 갚아주고 호의를 베풀어주었지만 여자들은 모두 그를 떠나겠다고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그 어머니도 숱한 남성들로부터 버림받았던 힐디치가 바랐던 것은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 누군가의 온전한 전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느낀 감정은 상실감이었다.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불행했던 유년시절이 그가 저지른 죄를 상쇄시킬 수 없다. 그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그를 통해 악은 의외로 우리의 주변에 상시적으로, 또한 보통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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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를 연상시킬만큼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힐디치의 상실감은 과연 특정 인물에 한정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많이 내재되어 있는 감정 중 하나가 상실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실감에 파묻혀 되는대로 희망없이 살아야만 할까? 
 


작가는 무심하고 각박한 세상에도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펠리시아는 길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비록 종교적인 이유때문일지라도 갈 곳없는 그녀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내어준 자메이카 여성, 노숙자의 이를 치료해주는 치과 의사. 그곳이 어디든 선과 악은 늘 동시에 존재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재회하지도 못했고, 아이를 지키지도 못한 펠리시아. 그러나 모든 것을 벗어던진 그녀는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손의 한 쪽만 따뜻하다면 손을 뒤집어 반대편도 따뜻하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은 펠리시아의 여정의 끝을 독자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문장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자유와 평안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조니, 조니의 진심, 힐디치가 중얼거리는 여성들, 그의 정체가 밝혀짐과 동시에 실종된 펠리시아. 그리고 조니와 재회할 수 있었지만 놓쳐버린 몇 번의 기회들이 안타까워 가슴 한 켠이 저릿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 의미하는 바가 크지만, 오롯이 펠리시아의 여정에만 집중해서 읽었다. 그녀의 지난 여정이 아름다웠다고 할 수 없지만, 뿌리박혀 내려온 그릇된 관습에서 자유로워질 앞으로의 여정에, 나와 더 자유로워질 여성들의 여정을 보태어 응원한다.
 



321.
항상, 어디에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르는 운명이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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