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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아델라이다는 이모들이 있었지만 유일한 가족이라고 여겼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연찮게 5층의 아우로라 페랄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거실 바닥에 죽은 채 누워있는 아우로라.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휴대폰과 집 열쇠 다발, 그리고 카라카스의 스페인 영사관에서 보낸 우편물을 확인하고 스페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아우로라가 스페인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아델라이다는 스페인 영사 편지와 생존 증명 요구서를 챙기고 안에서 조용히 문을 잠갔다. 이제 그녀는 아우로라의 시신을 처리해야하만 했다.
아우로라의 시신을 발코니 밖으로 던진 후 티셔츠로 얼굴을 가린 채 내려가 길에 굴러다니는 화염병 안의 휘발유를 시신에 들이붓고 불을 붙였다. 최류가스를 막기 위해 모두 얼굴을 셔츠로 가리고 있는 시위대와 그들을 진압하는 무장부대, 곳곳에 널부러져있는 시신들과 화염,그리고 최루가스가 구름처럼 피어나는 아비규환 속에서 불에 타고 있는 시신을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설은 1980년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정권으로 인해 20여년 동안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민주주의 역행, 정부를 등에 업고 손발이 되어 막강한 권력과 이익을 얻으면서 부정부패와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으로부터 희생당하고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점차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국 지폐는 가치가 없어진지 오래이고, 모든 거래는 유로화를 선호한다. 국가정보원은 가택 수색을 빌미로 약탈을 밥 먹듯이 하고, 무장대원들이 약탈한 물건을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다른 무장집단이 빼앗아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물품의 가격과 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다. 중병에 걸려도 치료받을 수 없고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약을 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혁명군 테러부대에게 죽을만큼 구타당하는 사회복지사, 시위에 참여한 학생 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까지 무분별하게 체포해 '무덤'이라는 곳으로 끌고가 극악한 고문과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가할 뿐만 아니라 반정부 행위를 했다는 강제 자백을 받아 시위 진압대원으로 이용한다. 끌려갔던 청년은 더이상 청년일 수 없다. 소설 속 아델라이다는 말했다. 개처럼 우리를 죽였다고.
그냥 지옥이다.
이런 곳에서 선택적 삶이란 가능하지 않다. 생존은 수치심과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다른 말이 되고,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는 배신의 다른 형태였다. 국가는 사람들에게 서로 남이 되는 형을 선고했고, 분열을 야기시켰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떠난 자와 남는 자, 산 자와 죽은 자.
주인공 아델라이다 팔콘은 오직 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의 신분을 도둑질한다. 그러나 지식인에 속했던 그녀는 시신을 불에 태우고, 어머니 곁에 묻힐 망자의 권리을 말소시킨 도덕적 책임에 괴로워하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의 본질과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군가의 이미지에 최대한 근접하게 흡수해 만들어진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관연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친구의 동생 산티아고를 통해 자신을 반추하며 용기가 아닌 도피를 선택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나타낸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아델라이다 팔콘이 어머니와 같은 이름인데, 아델라이다는 어머니를 긍정적이고 존경하는 인물로 그린다. 어머니 아델라이다 팔콘은 시골의 무지한 집안에서 스스로 교육받기를 선택하고 약혼자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자식과 타인에게 독서와 교육을 강조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존중과 예절이 살아있었던 어머니. 작가는 어머니 아델라이다 팔콘을 국가로 대변하고, 그녀의 죽음이 국가의 추락이며, 아델라이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버린다는 것은 국가를 스스로 버리는 지식인의 이탈을 상징한다.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딸 아델라이다의 생존이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참혹하다.
이 소설이 참 낯설지 않다. 장소와 사람의 이름만 바꾸면 우리의 현대사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깊이 이입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곧 5월 18일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