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카의 여행
헤더 모리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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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카는 소련군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고 크라쿠프 몬텔루피치 감옥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매춘과 스파이로 기소되어 노역 15년형에 처해져 시베리아로 보내져 이제 다른 장소에서 다른 번호로 불려진다. 굶주림과 추위, 가학적인 노동. 실카는 앞으로 다가올 15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절망에 휩싸인다. 불과 2년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25번 구역의 작은 방에서 독일군 장교 슈바르츠후버가 그녀를 상시로 성폭행하면서부터 실카는 감정을 상실했고, 그것은 아이였을 때 무릎을 심하게 긁힌 일과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다.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이곳에서는 생각의 스위치를 꺼야만 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전작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를 읽고 나는 실카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5년 노역형이라니... .  

보르쿠타 수용소는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만 없을 뿐 비르케나우와 다르지 않다. 수용소 내에서 여성 수용자는 집단강간을 고스란히 감수해야하는 가장 약한 존재이고, 간수 - 감독관 - 고참 수용자로 이어지는 야비한 권력자들, 폭력이 난무하며 선의와 악의의 모호한 경계는 하루하루 살아남으려는 자들을 위협한다.  

실카는 보르쿠타에서 상반된 감정에 늘 갈등한다. 동료들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근무환경이 편안한 실내에서 일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다. 그래서 고된 노동을 하는 동료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 더 나은 대우를 거부하고 막사 생활을 고집하지만, 한편으로는 환자들 곁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다. 또한 29번 막사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병동에서 빵과 약을 몰래 빼돌리면서도 약이 부족해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보르쿠타에 도착하고 첫 집단강간이 있은 후 조시는 실카가 저항도, 자신을 도와주지 도 않았다는 이유로 맹렬히 비난한다. 이런 유사한 비난은 수시로 일어나고, 실카는 자신이 왜 유대인이면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온 이유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조시의 원망과 한나의 비난이 왜 그녀를 향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옥같은 곳에서도 우정과 연대는 살아있다. 여성 수용자의 연대는 자수놓기로 이어져 있고, 우정은 새생명 나티아로 상징되며, 29번 막사는 그들의 공동체로 대변된다. 소설에서 실카는 수용자의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아유수비츠 문신가>의 랄레의 궤적과 같은 선상에 있다. 랄레보다는 실카가 이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친구의 행복이 삶을 견뎌내는 힘이 된다는 것이 납득이 안되다가 문득 그녀의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니 일정 부분 이해가 되더라는, 그리고 자수를 놓는 사소한 행위가 고통을 견디는 힘이 된다는 올가의 말에도 수긍이 갔다.  

소설에서는 실카가 '이상하리만치 운이 좋지만,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썼다. 그녀의 삶에 어떤 부분이 운이었을까? 수용소 생활 내내 도움을 주었던 의사 옐레나, 그리고 이후 50년을 함께 살아갈 알렉산드르, 무엇보다 그녀의 강인한 생명력이 실카가 타고난 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헤어진지 20년이 지나 해후한 기타와 실카의 감정을 감히 헤어릴 수 없다. 실카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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