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덮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남자의 자리> 에서 작가가 정식 교사가 된 후 정확히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소설은 스무 살 드니즈가 낙태 수술을 받은 후 대학 기숙사에서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를 회상하며 기록한 글로써 소설의 첫 장면은 그녀가 낙태 수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고 한때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우월감마저 느꼈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계층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립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지를 깨달으며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태생 자체를 지우고 싶어했던 한 여성, 드니즈 르쉬르의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드니즈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기 위해 스스로 세계를 둘로 나누는데, 표면적으로는 벗어나고 싶은 식료품점 세계 즉 가족과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줄 수 있는 학교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머무는 모든 공간이 분리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먼저 학교는 앞에서 언급했듯 상류층 사회로 진입할 디딤돌 역할을 해주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억압적인 공간이다. 가정은 자신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자 부끄러운 존재로써 벗어나야할 대상임과 동시에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채무감과 '바른 품행'과 '성공'을 강요하는 부담스러우나 한편으로는 연민의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듯 십대인 드니즈는 모든 생활에서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겪었을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독자는 한 개인이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수치심을 소설 속 허구, 혹은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 치부하면 그만일까? 현재 우리나라 교육 격차는 아니 에르노가 느꼈을 수치심과 다름하지 않다. 유치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교육 시장과 평준화되지 못한 공교육 현장은 대다수의 학생과 부모들이 좌절감을 맛본다. 아이는 부자가 아닌 부모를 원망하고, 부자가 아닌 부모는 자신의 무능함에 고개를 숙인다. 소설에서 드니즈가 학벌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 역시 현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체험을 통해 가족의 분열과 사회 격차와 집단의 문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왜 '빈 옷장'일까? 일차적으로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닐까? 드니즈의 어린 시절은 '빈 옷장'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일요일에만 입는 원피스를 그녀는 매일 입었고,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당에서 함께 뛰어놀던 모네트에 비하면 자신은 똑똑하고 풍족한 아이였다. 그런데 사립학교에 들어가보니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다. 엘리트 부모, 품위있고 다정한 조부모, 멋진 차, 음악과 미술을 통한 교양 등 그녀의 옷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는 소설의 첫 장면인 낙태 수술과 이어져 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삶의 목표에 도달하려던 순간 낙태로 인해 자궁은 찢기고 비워졌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빈 옷장의 폭력성'이라고 이해했다. '빈 옷장의 폭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족.
책을 읽다보니 책 표지가 왜 보라색인지를 알겠더라는. 소설 속에서 보라색 얼굴, 보라색 혀, 보라색 사탕이 언급되는데 비루한 생활을 표현해주는 색깔이었다. 보라색이 억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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