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장면 ㅣ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평점 :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8개월 전, 5미터 바닥으로 떨어진 R은 기억이 사라졌다. 그런데 애초에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던 그는 어떤 기억이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떻게 바닥으로 추락했는지, 아내의 목 뒤에 튀어나온 갈색 점이 있었는지, 직장 상사의 성이 무엇인지, 동료가 진짜 죽은 것인지, 아내가 언제 사라졌는지, 아내가 자신을 떠난 것인지, 자신이 아내를 떠난 것인지,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 예고없이 나타나는 낯선 감촉 혹은 낯익은 얼굴들이 툭툭 나타나 뒤섞이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는 생각보다 자신을 모르고, 자신이 모르는 자신을 상상해야 한다.
소설의 등장 인물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부유한다. R은 추락이후 죽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장례식까지 치른 직장 동료 L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처럼, 혹은 산 자처럼 중첨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를 끝내기 위해 아내가 자신을 얼음호수에 밀어넣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공중에 뜬 상태로 그저 '있을' 뿐이다. 오해를 풀자는 아내의 편지와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사. 오헤는 과연 오해일까, 무엇이 현실이고, 우리가 직시해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할까? 불확실한 매일을 반복하는 우리에게 사실적 현재가 존재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