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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리스
라이 커티스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20년 12월
평점 :
1986년 8월 31일, 72세 클로리스 월드립은 남편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비터루트 산맥 위를 날아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조종사와 남편은 사망하고 클로리스는 부서진 비행기 송신기 단추를 눌러 구조 요청을 한다.
송신기에 대고 수백번 구조 요청을 했지만 응답은 없고, 비가 내리며, 조종사의 얼굴은 너구리에게 뜯겨 나갔다. 이튿날 굽이진 계곡 사이로 연기가 보였다. 클로리스는 결정을 해야했다. 물도 없고 누가 무전을 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비행기 근처에서 계속 기다리려야 할까? 아니면 연기가 나는 곳까지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까? 운명의 결정을 한 클로리스는 죽어서 나무에 걸려있는 남편의 안경과 부츠 한 짝, 산속 기온차를 고려해 조종사의 울 코트를 비롯해 몇 가지를 챙겨 길을 떠났다.
세 시간여를 걸어 연기가 나던 숲속 작은 빈터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구름이 모여들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곧 해가 떨어져 어둠이 찾아올 것이므로 클로리스는 불을 피우지만 이어서 비가 내리고 그 비에 지도는 찢어지고 만다. 다시 한 시간을 걸어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에 도착해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다시 두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다시 어둠이 시작됐고 비가 내린 후라 불도 쉽사리 붙지 않았으며 짐승의 윤곽도 보였다. 배고픔, 진드기, 두려움. 마지막 성냥, 마지막 캐러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한 클로리스 월드립이 3개월여의 여정을 20년 후 아흔세 살의 나이에 쓴 회고록 양식의 서술과 산림 경비대원 데브라 루이스가 클로리스를 수색하면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교차해 진행된다.
모두 다 비슷한 인생을 산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칠십 평생, 비행기가 추락하고 살기 위해 산속을 걸으면서 클로리스는 지난 인생을 되짚는다. 부모, 이웃, 사랑했던 남편, 그리고 죽음까지. 당연하지 않은 것들도 당연하게 여기며,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며 살아왔었다. 자식이 꼭 좋은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이를 낳고 싶었다. 27살에 불임 판정을 받으며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할거라는 자책감에 죽고 싶었으나 살아냈다. 클로리스는 자연 안에서 오롯이 자신의 육체와 생명력에 집중하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클로리스가 수색대에게 구조되기 직전, 오두막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처참한 죽음을 지켜보고, 수습하지 못할 남편의 시신을 목도하고, 남편없이 살아야하는 삶, 그리고 야생 속에서 온갖 경험을 하고도 달라지지 않을 남은 인생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에게 오두막은 치유의 공간이었고, 화재가 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콜의존증을 앓고 있는 서른일곱 살 데브라 루이스. 몇 달 전 남편의 이중 결혼이 밝혀지고 심지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에 의해 충격과 상처를 받은 루이스는 삶 전체가 흔들린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클로리스에게 인생의 길을 잃은 자신을 이입하며 그녀의 구조에 집착하는 루이스. 때마침 파견나온 수색대장 블루어의 딸 열여덟 살 질이 산림 경비대 자원봉사자로 오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이외에도 소설에는 자신의 길에서 이탈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클로리스에게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마스크맨 머베크는 소아성애자로 수배자가 되어 산속에서 도피 중이었다. 사회의 잣대로 본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일테지만 그가 없었다면 클로리스는 살아남지 못했을테고 오두막의 화염 속에서 그녀를 구하고 죽었다. 머베크는 죽음으로써 세상에서 잊혀졌지만 적어도 클로리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는 하나의 '존재'로 남겨졌다. 자신의 길조차 찾지 못해 알콜에 의존하는 루이스를 통해 치유가 됐다고 말하며 떠나는 산림 경비대 자원봉사자 리프와 지병으로 죽은 엄마를 잊어가는 아빠를 멀리했던 질. 그들은 자연과 미숙한 동료들을 통해 서로에게 위안을 받는다.
소설의 마지막 클로리스와 질의 짧은 만남이 뭉클함을 전한다. 클로리스 월드립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