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는 설정에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아간다.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고 씻지도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용소에서 성행위를 하며 굶지 않기 위해 도덕성 따위는 던져버렸다. 또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총을 권력삼아 금품을 탈취하고 강간을 일삼는다. 결국 보통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살인자가 되고 방화범이 되고 만다.  
 
소설 전반에는 관용과 이타심, 그리고 도덕적 양심에 대해 묻는다. 
이타심으로 눈먼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준 남자는 그의 차를 훔치고 수용소에서 한 여성을 성추행한다. 그리고 처음에 눈이 먼 남자는 집까지 데려다 준 남자에게 고마워하다가 아내가 올 때까지 말벗이 되어주겠다는 남자의 호의를 의심한다. 안과 의사와 아내는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갈등하고, 정부는 수용소 내부에서 재소자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방치하며 심지어 민간인을 살상하고도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같은 처지인 재소자 깡패가 금품과 성 상납을 요구할 때에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깡패 두목을 살해한 사람을 찾아 범죄의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애초에 왜 실명이 된 것일까? 
 
187.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써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 것이고. 
 
소설 초반에 나오는 이 대목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도시 전체가 눈이 멀자 안과 의사 부부와 검은 색안경 여자, 안대 노인, 첫 번째 눈이 먼 부부, 그리고 어린 소년은 공동체를 이루어 먹을 것을 구하고, 서로를 씻겨 주며, 옷을 나눠 입는다. 또한 검은 색안경 여자의 집에 머물고 있는 노파에게까지 많지 않은 음식을 나눠준다. 그들이 다시 눈을 뜨기 직전 회복하는 것은 인간성과 이타심, 그리고 관용이었다. 이처럼 마지막에 이르러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라는 대목은 힘을 받는다. 소설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눈먼 사람들의 묘사는 흡사 좀비를 연상시킨다.

340-341.
비는 그쳤다. 이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눈먼 사람들은 없다. 뭘 하러 가는지 모르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들은 거리 이곳저곳을 배회하지만, 그리 오래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걷는 것이나 서 있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을 찾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 이 실명 전염병이 한 사람도 피해가지 않았다는 것, 현미경의 렌즈를 들여다볼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것, 연구소들도 다 텅 비어 박테리아들도 살려면 서로 잡아먹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자, 사람들은 치료법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약자를 갈취하며 이를 무관심으로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은 도시를 배회하는 눈먼 자들과 다를 바 없을 지 모른다. 검은 색안경 여자가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린 소년을 보호한 것, 아내가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깡패 두목을 살해하고 눈이 먼 일행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까닭이 책임감 뿐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처지에 이입하고 진심으로 감정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자로 살 수 없다는 것은 결국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극심해져가는 인간성과 관용의 상실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소설의 후반, 검은 안대 노인의 등을 밀어주는 검은 색안경 여자의 손길, 발코니에서 비를 맞아가며 옷을 빨고 서로를 씻겨주먀 웃음을 되찾는 세 여인의 모습은 따뜻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인간인 이유는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과 죽음에 대한 애도다. 이것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눈먼 자들의 도시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일테다. 
 
 
420.
우리가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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