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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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라는 남자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좀머 씨'라고 부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아내에게 생계를 맡긴 좀머 씨가 하루종일 하는 일은 '걷기'다. 겨울이면 검은색에 폭이 지나치게 넓고 길며 이상하게 뻣뻣한 너무 큰 외트를 입고 고무장화를 신었으며 빨간 색 털모자를 쓰고 다녔다. 여름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캐러멜색 리넨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항상 손에는 지팡이와 등에는 배낭을 메고 마을 근교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매일마다 좀머 씨의 걷는 모습을 보지만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잰걸음으로 하루에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7월 말 어느 일요일 오후,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그친 직후 여느날과 다름없이 길을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 마을의 남자가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며 차에 타기를 재촉하자 그가 던진 한 마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한 소년이 있다.

어린 시절 하늘을 날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기에 날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나무타기를 좋아하고, 조금 더 자라서는 짝사랑하는 소녀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실망하며, 그보다 더 자라서는 호랑이같은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무기력한 자신과 일방적인 세상에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5~6년쯤 지난후 소년은 더이상 나무를 타지 않는 대신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며 피아노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내키는대로 연주한다. 열여섯 번째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소년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으며 고전문학 작품을 읽고 보호자 없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볼 수 있다. 그의 인생 크고 작은 변곡점에는 항상 좀머 씨가 있었다.








소설은 한 소년이 몇 년에 걸쳐 좀머 씨라는 남성을 지켜보고 우연찮게 자신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에 좀머 씨와 맞닥뜨리며 그에 대한 감정과 단상들을 잔잔하게 펼쳐놓는다.


소년은 나는 것보다 땅에 다시 내려올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에 두려움을 느껴 대신 나무타기를 한다. 어린 소년이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 위는 늘 조용하고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며 탁 트인 시야와 귓가에 울리는 자연의 소리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 있으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좀머 씨다. 키가 고작 1미터를 겨우 넘긴 어린 소년은 좀머 씨가 자신이 나무를 타듯 자기 만족과 괘락을 위해서 걸어다니는 것이고 거기에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다고 이해한다.


소년이 좋아하는 카롤리나가 그에게 월요일에 함께 하교하자는 말을 건넸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준비를 한 소년에게 카롤리나는 약속이 취소됐음을 알리고 제 갈길을 간다. 낙담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소년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 좀머 씨.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시계의 초침처럼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남자, 소년은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로부터 1년 후, 피아노 레슨을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유로 10분이 늦은 소년. 그날 레슨 선생님은 그의 사정을 듣지도 않은 채 소년에게 온갖 모욕과 멸시를 퍼부었고 제 분에 못이겨 분노를 폭발했다. 고작 10분 지각했을 뿐인데(물론 피아노 연습도 안했고, 문제의 코딱지도 있었지만). 소년은 자괴감을 거쳐 불공정하고 포악스러운 세상에 분노를 일으키며 작별을 고하리라 작심하고는 죽음으로써 세상에 복수를 하고자 제일 큰 가문비 고목에 올랐다. 숨을 들이쉬고 셋에 뛰어내리겠노라 호언장담하지만 머뭇거리는 그 순간 여지없이 나타난 좀머 씨. 나무 위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본 소년은 각성한다.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다니,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 사춘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입구에 서있는 소년은 해질 무렵 친구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찮게 제 발로 강으로 걸어들어가는 좀머 씨를 발견하고 말리지도 못한 채 지켜본다. 소년이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 좀머 씨가 외쳤던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라는 말과 물속에 가라앉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후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는 그의 이름은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에기디우스 좀머'였다.







소설 속에 화자인 소년은 특별하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인물상이다. 어른들의 시시콜콜한 잔소리가 듣기 싫고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한번 쯤은 거절당해 봤으며 어른들의 부당한 분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성과에 대한 압박감과 조바심,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조여오는 시간의 부족과 긴장, 그리고 스스로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 등은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내내 달고 다녀야하는 족쇄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좀머 씨는 소년을 통해 이야기한다.

딱 한번 도움을 간청하였을 때 침묵하거나 외면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의리를 지킬 필요는 무엇이며,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지만 소년이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두려웠듯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좀머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도망치는 것 뿐. 어쩌면 스스로 강물에 들어간 것 역시 그 연장이 아니었을까... .


지금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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