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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스물세 살 쇼타는 높은 취업 관문에 좌절하고 가족, 친구들과 단절한 채 현재는 도쿄의 고층 빌딩 유리창 닦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가을, 여지없이 면접관의 냉담한 반응에 낙담해 자살을 생각한 그는 고층 빌딩을 둘러보던 중 가느다란 로프에 매달려 유리창 닦는 일을 하는 사람을 발견한 후 충동적으로 입사를 결정해 1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하고 있다. 어느날, 고급 맨션에서 작업을 하던 쇼타는 그 건물 3706호에 사는 노부인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그녀는 쇼타에게 청소하는 건물의 내부 사진을 찍어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정말로 도쿄 빌딩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노부인에게 받은 선금으로 장비를 구입하고 업무 당일의 파트너에게 들키지 않도록 카메라를 가슴께에 장착한 쇼타는 남모르게 촬영하는 데에 성공한다. 집으로 돌아와 촬영한 결과물을 확인하고, 자신이 무척 위험한 장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새끼 손가락 정도 굵기의 와이어, 견고한 고층 빌딩에 비하면 너무나도 부실한 금속제 곤돌라, 심지어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쉽게 흔들려 아무것도 작업자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여건, 더욱 놀라운 건 어느새 쇼타 자신이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 자신이 설계했던 미래였다면 지금쯤 양복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런 사람들을 창 밖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드는 쇼타는 문득 고층 빌딩 유리창 닦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일을 마친 후 작업 현장을 되돌아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이 하루에 이렇게 많은 유리창을 닦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그런데 쇼타는 유리창을 닦고 있을 때면 고층 빌딩에서 일을 하다 추락사 한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쇼타에게 살아있을 때 실제로 했던 말들이나 평소 자기의 생각, 일상의 잡담들을 쉼없이 늘어놓는다. 쇼타는 이러한 현상을 노부인에게 털어놓는데, 그녀는 자신도 같은 경험이 있다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사진을 보며 피사체를 분석하고 유추한다. 노부인과 쇼타는 사진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과나 식사를 나누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상대의 외로움과 현실에서의 좌절을 서로공유하며 위로한다.
어느날 쇼타는 함께 작업을 하는 동료에게 도촬 사실을 들키고, 그 동료 역시 재미삼아 촬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촬영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3706호를 방문해 자기의 의사를 전달한 쇼타는 그동안 찍은 사진으로 실내에 거리를 만든 노부인에게 조명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노부인과 헤어진 쇼타는 두 달만에 그녀가 살고 있는 맨션의 유리창 청소를 하게 되고 청문 밖에서 3706호가 비어있음을 확인한다. 노부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실패와 좌절로 인해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있기 때문에 살고 있는 청년 쇼타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노부인. 두 사람은 거래로 시작된 만남을 갖게 되면서 대화를 하게 되고 스스럼 없는 대화는 상대방의 입장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선사한다.
쇼타는 고층 건물 유리창 닦이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의 예정된 미래가 유리벽 안쪽에 있는 삶의 모습이었던 것과 유리벽 밖에서 위태롭게 줄에 매달려있는 자신의 현재 처지를 비교하며 자괴감을 넘어 무력함을 느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건물 안쪽에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노부인의 부탁을 받고 사진을 현상하면서 느낀 것은 자신이 동경했던 유리벽 안쪽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작은 주택가 골목에서 살고 싶었지만 안전을 위해 자식이 마련해준 고층 빌딩에 살면서 섬에 고립된 듯 살고 있는 노부인은 소통이 전혀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과연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며 쇼타에게 촬영을 부탁한다. 넓은 실내 공간을 채울 수 없어 상자를 세우고, 홀로 된 삶을 확인시켜주는 거울을 가려놓은 노부인은 도시인의 외로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쇼타는 곤돌라에서 촬영을 할 때면 죽은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삶에 관심을 보이자, 보이지 않는 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선배의 목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나왔던 울림은 아니었을까. 쇼타는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던 학생이었다. 다양한 삶의 경험없이 오로지 한 가지 길이 정답인 것처럼 살아온 그에게 실패란 곧 패배와 절망이었을 것이다. 쇼타에게 죽지못해 혹은 죽어도 그만인 고층 빌딩 유리창 청소 일이 노부인을 만남으로써 삶에 있어 한 겹의 경험으로 전환된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추억을 나눈다는 것, 관계의 힘이다. 이러한 관계가 자신을, 그리고 상대를 소중한 사람으로 만든다. 노부인을 알고 청소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녀가 사는 맨션을 찾는 쇼타에게 노부인은 더이상 유리벽 안에 있는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유하던 청년이 새롭게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세상의 잣대에 맞춰 사는 것이 꼭 성공한 삶이 아님을, 그래서 누군가가 규정해 놓은 삶의 의미가 아닌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를, 그리고 언제든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세상에 바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