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해나 켄트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92.
넌 괴물이 아니야.



1828년 3월, 아이슬란드 북부 후나바튼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농부 나탄과 도축업자 피에튀르이고, 피의자는 농부 프리드리크와 두 명의 하녀 시가와 아그네스다. 사건의 개요는 하녀 아그네스가 결혼까지 생각한 주인 나탄이 어린 하녀 시가에게 관심을 보이자 앙심을 품고 나탄의 돈을 노리는 열일곱 살 좀도둑 프리드리크와 작당해 자기의 주인인 나탄과 그날 동행이었던 피에튀르를 살해했다. 피에튀르는 망치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고, 나탄은 칼에 찔려 사망했다.  


세 사람은 살인과 방화로 기소,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례에 따르면 피의자 세 사람은 덴마크에 보내져 사형이 집행되어야하지만, 후나바튼의 군수 비외르든은 비용 문제로 그들을 아이슬란드 북부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그들을 구금하고 부족한 일손도 덜기 위해 머무룰 농가를 알아보는데, 아그네스가 배정된 집은 욘의 코르든사우 농장이다. 이곳은 그녀가 굶주린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한편 아그네스는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활용하여 자신의 담당 목사를 소르바르뒤르(토티) 부목사를 지목한다.  그는 이 사실을 비외르든 군수로부터 편지를 통해 전달받고, 일면식 없는 아그네스가 자신을 지목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만  아버지와 상의한 후 일단 그녀를 만나보기로 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의 아그네스. 토티 부목사는 그녀의 지난 과거를 들어보고자 한다. 



여섯 살 때 친엄마에게 버림받시피 헤어져 코르든사우 농장에 위탁 자녀로 들어간 아그네스는 위탁모 잉가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녀는 남편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의 눈을 피해 아그네스에게 찬송시를 읽어주었고, 사가를 가르쳤다. 아그네스는 엄마라고 부를만큼 잉가를 사랑했고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2년 뒤 잉가가 출산 후 바로 사망하면서 아그네스는 교구 빈민이 되었다. 이후 결혼도 못한 채 떠돌이처럼 하녀 생활을 하다가  나탄을 만나 연인이 된 아그네스. 나탄의 가정부가 그만두자 그녀에게 가정부 자리를 제안하고, 아그네스는 가정부에서 언젠가는 그의 아내가 될 거라는 꿈을 안고 거칠고 황량한 북부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나탄의 가정부라고 자처하는 열다섯 살 소녀 시가가 있었다. 나탄은 시가의 착각이라고 못박지만, 두 여인 앞에서 명확한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는다.  


어느날 나탄이 데리고 온 청년 프리드리크. 시가와 프리드리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나탄은 이를 질투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나탄의 실체. 그리고 프리드리크는 시가에게 청혼하지만, 나탄이 이를 거부하고 아그네스를 쫓아낸다. 겁에 질린 시가, 분노한 프리드리크, 나탄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그네스. 나탄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 그날 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이슬란드에서 마지막으로 사형된 아그네스 마그누스도티르의 실제 사건에 허구를 입힌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알려지고 기록된 아그네스의 인생과 살인 사건, 그리고 공간적 배경과 인물들은 대부분 사실이고, 소소한 사건이나 인물들의 감정은 허구이다. 소설은 아그네스의 1인칭 독백과 마르그리에트와 토티의 3인칭 관점으로 진행된다.  


아그네스는 당시 시대에서 하층민 더구나 빈민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소양을 갖추었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심지어 책 읽기를 좋아하며 교구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다. 검소하고 과묵하며 맡은 일에 성실하다. 즉 영리하고 똑똑하며 과묵한 하녀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신을 믿지 않는 나탄의 집으로 가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약초를 섞어 약을 만드는, 한마디로 마녀같은 존재다. 그래서 바로 참수형에 처해지지 않고 코르든사우 농장으로 보내지자, 욘의 가족들은 두려움에 떤다.  


171.
"그건 공정하지 못해요. 사람들은 남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고 판단할 뿐, 정작 당사자의 이야기는 들어주지도 않죠.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려고 해도, 이 계곡에서는 실수를 잊지 않아요.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요. 내면에서 아무리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고 외쳐도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결정되고 말아요."



사형 집행 전 종교적으로 회개를 해야하는 죄수에게 담당 목사가 정해지는데, 아그네스의 목사는 토티 부목사다. 아그네스는 어린 시절 스치는 인연으로 자기에게 호의를 보였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고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그런데 토티와 아그네스의 대화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농장의 안주인 마르그리에트다. 출산을 앞둔 로슬린의 태아가 거꾸로 선 것을 아그네스가 알아채고 신선초를 달여 먹여 순산을 도운 것이 계기가 되어 아그네스에 대한 경계를 낮추는 마르그리에트는 병이 나서 오지 못하는 부목사 토티를 대신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진실을 알게 된 마르그리에트와 그의 가족들. 하지만 아그네스가 그랬듯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독교 국가에서 신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배척, 여성이 갖는 한계, 그리고 여성 안에서도 하층민에게 가해지는 제약으로 인해 한 인간이 갖는 진심은 묻혀버린다.


마르그리에트와 아그네스가 대화를 하면서 서로에게 갖는 연민, 아그네스의 순수한 내면의 고독과 쓸쓸함, 그리고 북쪽 끝단에 위치한 아이슬란드의 추위까지 더해져 독자는 가슴에 한기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진부한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아그네스의 슬프고 아름다운 독백은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밤, 읽는 이로 하여금 홀로 읊조리는 그녀의 곁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마르그리에트가 그랬던 것처럼. 


55.
나는 조용히 지낸다. 세상에 나를 닫고, 마음을 다잡고,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들에 결연히 매달리자고 마음먹는다. 나마저 나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 내면의 나 자신에게 매달리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손이 틀 때까지 빨래하고 낫질하고 부엌일을 하며 쓴 시들. 내가 기억하는 사가들. 내게 남은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물속으로 침잠한다. 




♤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