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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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병으로 죽고 1년 뒤 엄마는 애인과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아홉 살 사라사는 약속이나 한 듯 순차적으로 사라진 부모님 대신에 이모네 집으로 옮겨 살게 된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라사는 관습적이고 배려심이 부족한 이모와 시도때도 없이 괴롭히는 사촌, 그리고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괴롭다.   
 
하교 후 아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매일 들르는 공원에는 로리콘(로리타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젊은 남자가 늘 벤치에 앉아 있다. 친구 요쿄는 사라사에게 주의를 주지만 사라사는 어쩐지 그가 나쁜 사람같지 않다. 사라사가 친구들과 헤어져 벤치에서 쉴 때에도 그 남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을 만큼 집에 돌아가기 싫은 어느날, 그 젊은 남자가 자기 집에 가겠냐고 묻자 사라사는 덥석 그를 따라가고, 그곳에서 이모네 집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잔다. 친구들이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사라사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하지 않았고, 이모네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사라사는 그 남자, 후미의 집에 머문다. 
 
사라사는 후미의 집에서 편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후미의 집 바깥 세상에서는 사라사의 실종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그렇게 2개월을 보내고 동물원에 간 두 사람은 결국 발각되고 만다. 다시 돌아온 이모네집. 그날 밤도 여지없이 사라사의 방에 들어온 사촌 다카하시는 사촌 여동생의 반격에 당황하고, 그 일로 사라사는 아동 보육시설로 보내진다. 
 
15년 후, 사라사는 직장 파트 타임 직원들 송별회를 하기 위해 방문한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후미를 발견한다. 이후 며칠동안 계속 그의 카페를 드나들었지만 사라사가 15년 동안 잊지 못했던 후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외면하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의 옆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함께하고 있다. 그의 소아성애증은 없어진 것일까? 그는 이제 사라사의 후미도, 소아성애자도 아니다. 한편 사라사의 행동에 변화를 느낀 그녀의 연인 료는 미행과 뒷조사를 통해 후미의 정체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다. 데이트 폭력 이력이 있었던 료는 사라사를 잃는 것이 두려워 폭력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마침 료와의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사라사는 결별을 결심한다. 사라사가 연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후미와 사라사.
  
사라사는 직장 동료인 싱글맘 안자이로부터 일주일 동안만 딸 리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덟 살인 리카가 여름방학이라 학교를 가지 않기 때문에 사라사는 난감해 하지만 후미가 도와주겠다는 말에 승낙한다. 그런데 15년 전의 사건은 두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료의 악의적인 제보와 인터뷰, 그리고 신고로 두 사람은 그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후미의 비밀을 알게 되는 사라사.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시기에 만나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었던 두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의 이야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복잡하고 씁쓸한 마음에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했다. 순간 순간 마음이 내려앉는 문장들과 주인공들의 처한 상황때문에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때가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해맑은 얼굴로 다녀오겠다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후 사촌 형제에게 성추행을 당하면서 도망칠 길 없는 무게를 두 어깨에 이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홉 살에 깨달은 아이. 
 
중학생 이후로 성적 성장이 멈춰버린 질병 사실을 부모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채 수치심과 자괴감을 안고 극도로 긴장된 매일을 보냈던, 그래서 차라리 소아성애자라는 오해가 더 마음이 편했던 열아홉 살 남자 아이.  
 
결핍과 상처가 있는 사라사와 후미는 서로 이해와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단단하게 결속되어진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어리다는 이유로. 후미는 깊은 곳에 감춰둔 비밀을 드러낼 수 없어 소아성애자라는 누명을 자진해서 뒤집어쓰고, 사람들은 사라사를 성범죄의 피해자로 낙인찍고, 심지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그녀에게 스톡흘름증후군까지 들이밀며 원하지 않는 동정심을 적선하듯 던진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매장당해야 할 가해자와 불쌍하고 불편한 피해자다. 서로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 뿐이다. 
 
84.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육체를 욕망하지도 않고,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구속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 주었던 대상을 15년 동안 잊지 못했던 두 남녀의 관계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유랑민처럼 어딘가로 흘러들어 다시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릴지라도, 좋을 것이다. 더이상 혼자 외로이 무섭지 않아도 될테니까. 
 
 
283.
우리는 부모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렵다. 우리 사이에는 말로 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만, 무엇으로도 우리를 단정 지을 수 없다. 그저 따로따로 혼자 지내며, 그러나 그것이 서로를 무척 가깝게 느끼게 한다. 나는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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