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수진은, 집은 사람이 살고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가고 정다운 사람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자연스럽게 내미는 단정한 사람이다. 
 
어느 일요일,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회사 건물의 조경을 맡은 한솔에게 작은 배려를 하게 되고 그날 이후 한솔은 수진에게 수줍은 사랑 고백을 시작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담은 이메일을 보내면서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아이처럼 한걸음씩 다가온다. 과거 자신이 혁범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바라보며 직진하는 맑은 한솔을 보면서, 혁범을 향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수진. 가만히 짚어보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솔의 나이가 몇 년전 혁범을 바라보던 그때 자신의 나이와 같은 스물여덟 살. 수진은 한솔을 통해 혁범과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잘 성장해 자기 삶에 대한 기본 방침이 정해져 있으며 기본적으로 책임 의식이 강하고 관대한, 그야말로 어른스러운 사람이 혁범이다. 7년 전, 수진은 근무하던 설계 회사에서 사수였던 혁범을 마음에 담았으나 고백도 해 보기 전에 그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그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 유학을 다녀온 후 그가 이혼해 건축 설계 사무소 개업 준비를 한다는 말에 먼저 연락해서 현재는 혁범이 공동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수진은 혁범을 짝사랑했을 당시 혁범의 나이가 되어 있고, 두 사람은 연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는 혁범의 성정으로 수진은 함께 있어도 외롭다. 
 
혁범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혼자 보내는 수진의 시간에 어느날부터 한솔이 들어와 있고, 오롯이 자신만을 향해 있는 한솔의 무채색같은 순수한 마음에 수진은 흔들린다. 그러나 수진도, 한솔도 안다. 수진의 마음이 한솔을 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한솔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한솔의 마음을 잘 알기에 수진은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을 느낀다.  
 




 
 
사랑.
누구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고, 단정할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색깔을 가진 감정. 그래서 인류 탄생이래 끝없이 반복되며 인간을 울고 웃게 만드는, 그리하며 수많은 분야에서 지치지도 않고 소재로 이용되는 복잡미묘한 그것. 
 
우리는 수진, 한솔, 혁범이 겪은 사랑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사랑이 끝날때마다 조금씩 노련해져 어느새 누구의 사랑이 더 깊은가를 저울질하게 되며, 노련함을 발휘하지 못하면 주변에서는 철부지로 치부해버린다.  
 
수진은 처음 혁범을 선배로서, 직업인으로서,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의 말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런데 서른다섯 살 현재, 이혼하고 아이와의 시간을 보내는 그를 보면서 그의 말이 정말 다 사실인지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곁에 있는 사랑에 대해 당연하게 여긴다. 일심동체, 이심전심이라는 말로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일 거라고 넘겨짚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밀어놓는다. 익숙함과 편안함을 지루함으로 여기며 가슴 뛰는 설레임만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왜, 상대를 지속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새로운 상대를 찾아다닐까?  
 
요즘에는 사랑도 사치인 세상이다. 돈이 없으면 연애도 할 수 없다는 말, 참 씁쓸하다.  작가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어떤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물며 겁도 없이 다가서고, 계산 없이 이해하고, 상처를 온몸으로 떠안는 그런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투명한 사랑'이 필요한 시대라고 이야기하며 '진정한 어른의 사랑이란 그러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임을 갈수록 확신하게'된다고 말한다. 
 
상대가 나이듦을 지켜봐주고, 내가 기쁜 일에 사심없이 기뻐해주고, 한때 느꼈던 강렬한 빛은 더이상 없지만 그 특별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모습에 안도하는, 그리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신기해하는, 그리고 아주 가끔 지금보다는 더 젊었던 시절 저돌적이고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감사해하고 다독거릴 수 있는 그런 잔잔한 사랑이 아름답다. 그들처럼.  
 
소설을 덮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종종 삶에 찾아오는 위기마다 손을 놓지 않는, 놓을 수 없는 그대들이 있어 참 다행이고 또 다행이라고 되뇌인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