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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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 열두 명을 죽인 후 정치적 의도와 공범 없이 모든 혐의를 인정한 사형수 474번. 주민번호도 없고 지문 등록도 되어 있지 않으며 범죄기록도 없다.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남자. 그는 변명도, 억울함도 토로하지 않고 교도관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며 위장과 위악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주눅들지 않는다.  


474번에게 호기심어린 관심을 두는 이가 있으니 그의 담당관 '윤'이다. 474번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은 윤에게 기회가 온다. 일가붙이 하나 없다는 그에게 면회를 신청하는 여자가 있다. 40대 후반 여성 신해경. 474번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반응한다. 윤은 그를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며 조금씩 다가가지만, ,474번은 경고한다. 알고 싶어하지 말라고, 각오를 해야할 거라고.


신해경과 면회한 후 474번은 교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온 안 목사에게 당장 자신의 사형을 실행하지 않으면 교도관과 수형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안 목사가 방송국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사실상 사형 금지국과 다를 바 없었던 정부는 다른 사형수와의 형평성 문제 등으로 일은 일파만파 커진다.


도대체 신해경은 누구이고, 그는 어째서 세상에 증명되지 않은 존재이며, 왜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것일까?







선천적 무통각증 병을 안고 사는 남매는 오로지 둘이 전부였다. 어머니 없이 방치와 학대를 자행하는 아버지의 몸에 칼을 꽂은 누나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 무통각증으로 언제라도 목숨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누나는 동생에게 항상 다짐을 두었다. 항상 스스로 몸을 잘 살피라고, 절대 부주의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돌로 두더지를 처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누나는 떠났다. 동생은 자신의 솔직함을 후회했고, 자신을 두려워해서 떠난 누나를 원망했고, 오랜 세월이 흘러 누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를 빼앗기로 했다. 바로 자신을.


누나에게 버림받은 후 스스로 누군가를 죽이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해준은 청부살인업자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그 어떤 죽음에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증명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자신의 존재, 그래서 '유령'으로 불리며 안착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부유하는 삶을 멈추고 싶었던 해준. 그러나 누나가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거부당한 존재가 아닌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였었음을 깨달은 후 삶의 의욕을 보이고, 해경은 이제라도 동생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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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가정사와 불우한 유년 시절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설정의 소설은 이 작품만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타인에게 유해를 가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은 유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삶의 인과관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닐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된 악의 본성.
해경이 해준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청부살인업자가 되지 않았을까? 해준 스스로 죽고 싶었던 이유는 존재를 거부당한 것에 기반한다. 그러나 누나가 떠나기 이전부터 해준은 살의 욕구가 있었고, 이는 해경도 다르지 않다. 해준은 죽고 사는 것에 있어 옳고 그름에 대한 인지가 없었으며 선과 악에 대한 학습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해준을 지켜본 교도관 윤에게서 악의를 느낀다. 


39.
무표정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 윤은 그것을 잘했다.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것은 선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악한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기다리고 지켜봤다.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도 지켜봤다.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 인과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무고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윤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고 선 앞에 서 있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윤이 해준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윤이 죄수 474를 관찰한 기저가 선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예전부터 직접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윤의 모습은 곱씹어볼수록 익숙하다. 타인의 고통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그들의 불행과 절망을 나몰라라 하는 모습은 우리가 쉽고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이다.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 내내 도덕과 윤리를 배우지만 이를 실생활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는 거의 전무하다.


악의 본성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만이 '악'일까? 근거 없는 사실을 진실인 양 유포하고, 사실 확인이 되지 않는 기사에 악플을 달고, 불법 촬영과 신상털기, SNS 마녀 사냥 등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타인의 일상을 난도질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 각자가 내재한 악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악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슨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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