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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맨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8
백민석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7월
평점 :
비극과 불행은 무차별적이다.
한 방송국의 피디에게 USB가 보내진다. 첫번째 수취인이다. 이후 여러 언론 매체에 같은 우편물이 도착하지만 그 USB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한 시사주간지의 기자가 유일하게 USB 음성파일을 듣는데, 내용은 이렇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 한 명을 토요일에 살해하겠다.'
사건, 사고, 자살을 모두 합하면 대한민국에서 하루 사망자는 평균 50여 명이다. 이들 중에서 누가 협박범의 피해자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사망자가 사망 당일 발견되었다는 보장도 없다. 이 음성파일은 9월부터 각 언론사에 보내졌음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은 지난 한 달 반 동안 사망한 3000여 명을 신원조회부터 사망확인서까지 다시 흝었지만 정작 무얼 알아내야 하는지 조차 알 수 가 없는 지경이다. 더구나 USB는 여전히 꾸준히 언론사에 도착하고 있다.
2016년 10월, 대통령 사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이 광화문에 모여들 때였다. 누구라도 협박범일 수 있고, 누구도 협박범이 아닐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사건은 하 경감의 단독 수사로 떨어지고, 그녀는 USB에서 전해지는 무감각한 목소리를 빗대어 협박범에게 플라스틱맨이라는 별칭을 붙인다. 하경감은 살인사건이 접수 될 때마다 현장을 찾아 다니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는 진전이 없다. 그래서 USB를 처음 들었던 시사주간지 기자의 유튜브 채널로 협박범의 음성파일을 공개했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애꿎은 시민이 또 죽는다"
그러자 너도나도 '내가 플라스틱맨을 알고 있다'는 제보 전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고양이 학대범, 음험하게 보인다는 회사 동료, 애인을 채간 친구, 학교 담임, 술집 바텐더, 라이벌 조폭, 심지어 1980년 광주에서 보았다는 제보까지. 이 와중에 음성파일을 받아서 전달해 주고 유튜브 공개 영상까지 도움을 주었던 시사주간지 기자가 실종된다.
그러나 하 경감은 끝도 없는 이 사건이 헌재에서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면 해결되리라 여겼다. 대부분 국민의 공분을 산 현 대통령의 탄핵은 기정사실이었다. 음성파일이 전달된 후 5개월이 지나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되지 않았다.
이로써 플라스틱맨의 사건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사건의 규모는 눈덩이 커지듯이 커진다. 폭탄 테러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헌재의 인정을 받은 대통령은 안하무인이며, 대통령 사임을 촉구하는 시위는 더 격해져 대규모 시위 안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난다.
플라스틱맨은 누구일까?
하 경장은 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소설은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웠던 2016년 10월부터 2017년 4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 시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현실과는 다르게 탄핵이 기각된 것으로 설정했다.
대통령의 퇴진을 조건으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협박범의 음성파일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스토리가 진행하는 동안 그 어떤 단서도 내놓지 않는다. 오로지 감정이 배제된 메마른 음성만이 유일한 단서요 증거다. 또한 왜 이러한 사건을 벌이는지에 대한 동기도 제시되지 않는다.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서 협박범의 요구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장난같은 요구를 하는데, 이는 결국 요구가 관철이 되든 안되든 자기는 무고한 시민을 죽이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버스와 성당이 폭탄 테러를 당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범인이 플라스틱맨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이제 협박범의 범행 동기나 검거는 중요하지 않다. 이 플라스틱맨의 건조한 협박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경찰은 사건을 접수하면서 처음부터 '셜록 홈즈 사건(의미도 가치도 없는 사건)'으로 치부했다. 대통령의 탄핵을 한 목소리로 주장하던 행정부와 사법부도 탄핵이 기각된 후 말을 바꾼다.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기득권층은 애초에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태는 나랏일하는 사람들에 국한될까? 협박범의 음성파일이 공개되면서 시민들은 평소 자신들이 불만을 품었거나 시기, 혹은 특별한 이유없이 미심쩍은 사람들을 플라스틱맨이라고 제보한다. 소설 첫 부분에는 플라스틱의 어원을 들면서 플라스틱의 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10-11.
플라스틱은 열을 가하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유동성을 갖게 되지만 일단 굳으면 우주탐사선의 부품으로 슬 수 있을 만치 단단해진다. (...) 플라스틱은, 사람으로 치면 어떤 일어도 얼굴이 빨개지거나 창백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였다. 모두 함께 뜨거워졌지만, 일상으로 돌아간 우리의 모습을 보라.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고정관념으로 씌어진 선입견이나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고려보다는 자기중심적으로 납득하고, 큰 용기를 담보하지 않으면 공동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무색무취로 만들고 있음을 간과한다. 그저 집단에 묻어가는 것이 본전이라 여기는 현 세태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하 경장의 플라스틱맨 용의자 리스트에 우리의 이름은 없을까?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 있을까?
[소설 속으로]
61.
사람들은 비난보다 무관심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
71.
내가 살면서 한 번은 플라스틱맨을 만났던 거 같아요.
86.
흉포는 플라스틱맨의 특징이 아니었다. 플라스틱맨은 너무나 흉포해서 누구의 눈에 띄도록 생겨먹은 놈이 아니었다. 그 정반대였다. 제보자들을 저마다 자기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들만큼 흔하고 평범하고 레디메이드 같을 게 분명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생산 플라스틱 마네킹 같은.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